아버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76화

by 파랑몽상

꿈이 아니었구나

수평선 너머로
따뜻한 햇살이 조용히 얼굴을 내밀었다.

하코다테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아침.

나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이불 안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고,
붉은 여명이 방 안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옆에는 소에다가 잠들어 있었다.

빛이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고,
고른 숨에 따라 가슴이 천천히 오르내렸다.

나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끝에 닿았다.

잠시, 그대로였다.

바다는 밤과 아침 사이에서
천천히 색을 바꾸고 있었다.

회색, 옅은 파랑,
그리고 번지는 분홍빛.

멀리 어선 하나가 지나갔다.

나래는 조용히 이불 밖으로 나왔다.

유카타를 여미며 창가에 섰다.

파도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 꿈이 아니었구나.”

그 말은 유리창에 닿았다가 천천히 흩어졌다.

어젯밤의 고백과 조용한 온기.

모든 것이,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이끌리듯

소에다는 팔을 뻗었다. 나래가 옆자리에 없었다.

반쯤 눈을 뜬 그는 창가에 서 있는 나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더 이상 소녀도 아니고, 완전히 여자가 된 것도 아닌, 그 경계 어딘가에 서 있는 듯한.

"나래... 벌써 일어났어?"

"어? 일어났어요? 오늘은 그냥 스르르 눈이 떠졌어요."

소에다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나래는 그 손짓에 이끌리듯 다가와,
그의 품에 조용히 안겼다.

그녀의 온기가 닿는 순간,
소에다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계절이
이제야 자신의 곁에 닿은 것처럼.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조금 더 끌어안았다.

“… 고마워.”

“내 곁에 있어줘서.”

소에다는 나래의 입술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그의 온기가 천천히 가슴으로 번져갔다. 어젯밤까지 불안했던 마음이, 이제는 고요한 바다처럼 잔잔해졌다.

나래는 깨달았다. 진짜 사랑은 의심을 지워가는 것이 아니라, 확신을 쌓아가는 것이라는 걸.


커피 한 잔의 아침

"선생님이 씻는 동안 저는 로비에서 기다릴게요. 커피라도 마시면서요."

나래는 먼저 씻고 유카타 대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로비 커피숍에 앉아 창밖의 쓰가루 해협을 바라보며 소에다를 기다렸다.

진한 커피 향이 가득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소에다가 샤워를 마치고 로비로 내려왔다.

약간 헝클어진 머리였지만 나래를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따뜻했다.

"춥지 않아?"

"전혀요. 커피 한 잔에 이렇게까지 감동한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잔잔한 파도에 떠오르는 태양까지... 이보다 완벽한 아침이 있을까요?"

나래가 환하게 웃었다.

둘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선이 점점 작아지며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갔다.

홋카이도 그녀 이나래 브런치 이미지 76화.png

함께라는 것

"오늘은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하코다테 아침 시장이요. TV에서 봤는데 신선한 해산물을 많이 먹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나래가 가고 싶다는 곳이면 어디든 좋아."

소에다는 소파 걸이에 무심히 놓여 있던 나래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 어제 먹었던 성게 또 먹을까요?"

"나래, 이젠 제대로 된 성게 맛을 알게 된 거 아냐?"

둘은 동시에 웃었다.

함께 하는 여행, 함께 맞이하는 아침, 함께 나누는 웃음. 나래는 이제 실감했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이 된 것이다.


아버님께서

그때, 오카미상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소에다 씨, 죄송합니다만… 아버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소에다는 잡고 있던 나래의 손을 더 꼭 쥐었다. 그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갔다.

창밖의 금빛 바다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작가의 말]

소설에 쓴 것처럼
제 유학 시절 친구들은
사회인 전형으로 만난 소중한 인연들입니다.

함께 나이를 먹어가다 보니
어느덧 다들 일흔을 넘기셨고,

소에다 선생님도
아마 예순은 넘으셨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이제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문득 그분들이 많이 떠오릅니다.

올해는
홋카이도에 한 번 다녀오려고 합니다.

그때의 얼굴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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