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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인 Aug 23. 2024

우주와 우주를 뛰어넘기

⎯김초엽론 ; 우리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기에

1. 비웃음의 근접학(Proxemics)


  댓글은 웃고 있었다. 이태원 압사 사고 유가족과 천안함 피격 사건 유가족의 반응을 비교하는 노골적인 영상이었다. 경찰관과 몸싸움하며 길을 열라고 소리 지르는 이태원 유가족의 모습을 먼저 비추었다가, 이어 천안함 국민 성금을 해군에 모두 기부했다고 밝혀진 유가족이 모 정치인과 담담히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뜨거운 슬픔과 차가운 슬픔. 두 유가족 모두 상실의 아픔을 토로하고 있었지만, 냉소의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의 반응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1.7만 개의 댓글은 천안함 유가족을 칭송하는 동시에, 반대로 이태원 사상자와 유가족을 비웃는 하나의 문화적 코드를 생성하고 있었다. 비웃음. 그러니깐 유가족의 행동을 업신여기는 그들의 태도 속에는 ‘놀다가 죽은 이들에게 국가가 나의 세금을 사용하여 배상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라는 개인적 맥락과 ‘체면 없이 밤늦게 음주가무를 즐기는 행위에 대한 멸시’라는 사회적 맥락이 공존하고 있었다. ‘좋아요’가 수천이 넘어가는 혐오 댓글을 통해, 우리는 (댓글 내용의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서) 현대 사회가 얼마나 냉소로 가득 찼는지⎯죽음을 평가내리며 타인에 대한 공감을 배제하려 하는지⎯단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이런 웃음을 자주 목격해 왔다. 유명 배우의 자살 기사 댓글에서, 독립 유공자의 비참한 말로를 담은 다큐멘터리에서, 최근 논란이 불거진 인물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누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특히 익명성으로 가득 찬 인터넷 세계에서 차가운 비웃음이 들끓고 있는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였던 에드워드 홀은 저서, 『숨겨진 차원』에서 언어의 특수한 정밀함으로써 인간의 공간 이용의 상호 관련된 관찰과 이론인 근접학(Proxemics)을 제시한다. 홀은 이 근접학에서 관계에 따른 인간의 소통 거리를 다루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가족이나 연인처럼 친밀한 유대 관계가 전제된 상대와 대화를 나눌 때의 거리(46cm 이하)와 대화 행동 및 내용에 정중한 격식이 요구되는 상대와 대화를 나눌 때의 거리(122cm~366cm)를 철저하게 구분한다는 것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상대와의 거리에 따라 친밀도를 느끼고 상대를 대하는 태도를 결정한다는 뜻인데, 이 논지는 인터넷이라는 대안적 공간이 무한한 거리를 두고서 타자를 규정할 수 있다는 지점에서 우리에게 색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상대가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에 사람들은 공감하거나 이해하지 않고 그저 건조한 시선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뿐이다. 어쩌면 인터넷 공간에서는 ‘나’와 ‘너’의 거리가 행성과 행성만큼, 우주와 우주만큼 떨어져 있을 지도 모른다. 온라인 속. 볼 수 없고 대화 나눌 수 없는  ‘유가족’을 대하는 ‘댓글’의 언행에서 공감과 이해를 배제한 거침없는 태도가 드러난 이유는 댓글 작성자가 유가족에게 무한한 거리감을 느끼기 때문임을 이러한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댓글창은 ‘나’와 나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는 또 다른 ‘나’밖에 없다. 마치 지구라는 행성에는 지구인만 살아가는 것처럼.


  빅뱅 우주론에 따르면 현재 우주는 광속의 3배속 가까이 되는 속도로 팽창하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멀어지는 중이다. 그리고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우리’와 ‘우리’의 거리 또한 우주처럼 점점 멀어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최근 온라인 세계에서 형성됐던 이러한 거리 두기가 혐오라는 방식으로 오프라인 세계에서 드러나고 있다. 여성, 남성, 퀴어, 장애인, 세대 갈등이 심해져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판단을 거리낌 없이 실행하며 이해와 공감을 배제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와 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 것인가? 이 세상은 점점 멀어질 뿐인가?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은 정말로 없는 것일까?



2.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우주여행⎯김초엽의 SF


  김초엽이 「관내분실」이라는 단편을 제시하며 SF작가로서 문단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부터, 자신의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에서 일찍이 잃어버린 감각일지도 모른다. 김초엽의 소설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 오후, 비밀이 많아서 속내를 짐작할 수 없던 외할머니가 나를 몰래 불러내 마주 앉은 채로 옛날이야기를 전해주는 것만 같다. 몽환적이면서 따뜻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평소에 내가 생각하던 외할머니와 지금의 외할머니가 색다르게 보인다. 점점 그녀를 이해하게 되고, 그녀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실제로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는 여러 단편이 관찰자가 어느 실패자의 이야기를 듣거나 관측하는 액자식 구성을 가진다. 이러한 구성은 타인을 이해하는 인물을 효과적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보다 쉬운 방식으로 SF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독자에게 납득시킨다. 치밀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채로 전개되는 김초엽의 여러 단편을 통해 우리는 앞서 던졌던 의문인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한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행성과 행성 사이의 거리만큼 구성원들이 단절된 사회 속에서 꿋꿋이 우주선을 타고 ‘너’에게 다가가려는 인물들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어째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타인에게 접근하려는 걸까, 자연스레 되묻게 된다.


  「관내분실」은 데이터 시뮬레이션으로 죽은 가족과 만나는 신비로운 세계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장하는 ‘도서관’에서 지민은 엄마의 영혼이 분실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되찾기 위해 그 생애를 뒤쫓는다. 비록 그녀가 지민에게 있어선 “제대로 된 사랑을 준 적 없는 형편없는 엄마”이지만, 지민은 “엄마를 특정할 물건 하나”없다는 현실을 파악하고 어쩌면 도서관에서 영혼이 분실되기 전에도 “엄마는 세계에서 지워져 있었”다는 연민을 품고서 보다 본격적으로 분실된 영혼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녀의 생애를 뒤쫓으며 지민은 “해야 할 말”을 가지게 되었고, 마지막에 이르러 그녀를 마주하며 “엄마를 이해해요(「관내분실」).”라는 고백을 전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무한한 거리를 둔 상대에게 다가가려 하는 태도는 「나의 우주영웅에 관하여」로 이어진다. 이 단편에서는 우주 저편으로 갈 수 있는 통로인 ‘터널’이 발견되었고, 인류는 우주비행사를 엄선하여 터널 너머를 탐사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그리고 단 세 명만을 뽑는 인류 대표의 우주비행사 자리에 “이미 한 차례의 임신과 출산을 겪은 동양인 여성”인 재경이 뽑히게 된 것이다. “부적절한 인물”인 것 같다는 세상의 날카로운 의심과 동시에, “많은 아이들의 영웅이 되”며 소수자를 대표한다는 무거운 기대를 받았던 재경은 무사히 최종 훈련을 마무리한다. 그렇게 인류 최초로 터널을 통과할 일만을 남겨두었지만, 갑작스럽게도 재경은 발사 전날 대기지역을 이탈하여 바다로 뛰어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터널 너머로 향한 (재경의 자리가 비어있는) 캡슐은 터널에 도달하기도 전에 폭발했고 항공우주국은 재경의 ‘계약위반’을 은폐하게 되었다. ‘가윤’은 재경을 영웅으로 삼고 노력하여 그녀와 같은 우주비행사 프로젝트에 합격하였지만, 임무 전날 돌연 바다로 뛰어든 재경의 진실에 대해 듣게 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가윤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다양한 훈련 과정을 수행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던 재경을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과소대표 되면서 동시에 과대대표되었”던 재경은 기대와 의심의 “굴레 자체를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나의 우주영웅에 관하여)」”을 시도했던 것이다. 세상은 재경을 재경으로 바라보지 않고 ‘영웅, 또는 임무 부적격자’로만 판단했다. 프레임을 씌우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상대를 바라보는 것은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대표자로서 똑같은 ‘폭력’⎯일방적인 기대와 의심을 받게 된 가윤은 임무를 포기하고 세상으로부터 탈출을 선택한 재경과 가장 비슷한 경험을 하여 재경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독자적인 위치의 인물이 되는 것이다. 


  재경이 세상‘의’ 영웅이 아니라 나(가윤)‘의’ 영웅인 것처럼, 김초엽‘의’ SF는 보통의 SF와 큰 차별점을 가진다. 과학적 사실이나 가설을 바탕으로 언젠가 도래할지 모르는 미래의 모습을 제시하는 SF소설은 본래 과학적 상상력을 통하여 새로운 관념이나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둔다. 하지만 김초엽의 SF는 이러한 경향에서 벗어나 오늘날로부터 그리 멀지 떨어지지 않은 미래를 조명함으로써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SF장르를 사용한다. 김초엽의 세계 속에는 과학기술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보편)과 다르게 “지능이 낮거나, 외모가 흉측하거나, 키가 작고 왜소하거나, 병들어 있다고 생각(「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되는 상대와 거리를 두려 하고, 쉽게 사람을 평가내리는 “헛소리를 써대는 신문 기사(「나의 우주영웅에 관하여」)”가 넘쳐난다. 생김새와 문화가 완전히 다른 외계 무리인(「스펙트럼」)이 존재하고, 우주 항공 기술이 발전하며 인류가 우주 각지의 행성에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는 김초엽의 세계(「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속에서는 어쩌면 현대 사회보다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이 고단하고 힘겨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현실보다 타인을 이해하기 어려운 배경을 뒤로하고,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어느 인물을 우리가 목격했을 때 이것을 “놀랍고 아름다운(「스펙트럼」)” 일이라고 감각 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을 통해 뭔가 더 나은 미래를 그리려고 했다기보다는 뭔가 그냥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보고 싶었죠. 그런 마음에 좀 더 가까운 거 같아요. 소설 속에 어떤 미래가 등장하든지 사실 우리가 볼 수 없는 미래잖아요.

  제가 항상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작품 속의 세계가 현실도피처럼 느껴지기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조금은 더 나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그런 작품을 쓰고 싶거든요.


⎯김초엽의 인터뷰 중 발췌


  SF소설은 외계인, 유전자 개조인, 사이보그 등 우리가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형태의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낯선 타자를 만나서 상호작용을 하기에 적절한 장르이며, 또한 과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쓰였기에 독자가 실제 사회의 현실을 자유롭게 대입하여 상상하고 성찰하기 수월하다. 김초엽은 이러한 SF의 장르적 특징을 놓치지 않고 사용하여 우리에게 깊은 여운을 남겨준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속 ‘안나’가 말했듯 우리는 아직 빛의 속도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이 우주를, 그리고 타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정복하기라도 한 것처럼 군다. 고통을 호소하는 상대에게 비웃음을 남기는 이들이 있다. ‘사람은 서로 다르다’라는 자명한 진실을 잊어버린 이들이 있다. 그들은 개별적인 사람이 각자 어떻게 다른 행복과 고통을 경험하는지 망각하였기에 자신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타인을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타인을 빛의 속도로 이해할 수 없다. 웜홀처럼 한 순간에 타인에게 다다를 수 없는 것이다.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일은 구식 우주선을 타고 슬렌포비아로 향하는 일처럼, 오랜 시간이 걸리고 실패할 확률이 높은 “말도 안 되는 얘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구식 우주선을 타고 “가야 할 곳”으로 떠난 안나가 있다.


  남자는 커다란 위성들 사이에서 초라한 안나의 셔틀이 파편들을 피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실수로 부딪히기라도 하면 금세 산산조각 나버릴 것 같은 작은 몸집이었다. 낡은 셔틀에는 아주 오래된 가속 장치와 작은 연료통 외에는 붙어 있는 게 없었다. 아무리 가속하더라도, 빛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한참을 가도 그녀가 가고자 했던 곳에는 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안나의 뒷모습은 자신의 목적지를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안나는 곧 파편이 없는 공간으로 들어섰다. 이제 그녀를 방해하는 것은 없었다. 안나의 셔틀은 점점 속도를 높이며 지구로부터 멀어져갔다. 남자는 조종실 버튼에서 손을 놓았다. 문득 남자는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먼 곳의 별들은 마치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그 사이에서 작고 오래된 셔틀 하나만이 멈춘 공간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에서


  우리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안다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3. i는 왜 돌아오지 않는가

 ⎯ 이것은 i에게 전하는 편지


  형을 마지막으로 본 지 2년이 다 되어가네. 매스컴에서 그 사건이 언급되는 빈도는 줄어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날이 계속 떠올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각자마다 그런 건 하나쯤 가지고 살아가는 거잖아. 시간의 풍파에도 도저히 깎이지 않는, 가슴 한구석에서 영원히 빛나는 작고 흰 돌 같은 거 말이야.


  사고 소식을 접하고 며칠 뒤에 홀린 듯 이태원역으로 향했던 날을 기억해. 몇 번 출구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찾아갔지만 현장에 직접 다가가니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게 많았어. 개찰구에 카드를 찍고 통과하자 곧바로 포스트잇이 보이더라고. 그 노란 흔적을 쫓아가니 포스트잇으로 빽빽하게 뒤덮인 출구 하나가 있었어. 상상이 돼? 커다란 출구가 손바닥 만한 포스트잇에 잡아먹힌 모습을. 나는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그 압도적인 풍경을 바라보기만 했지.


  함께 계단을 올라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라. 헤드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던 청년도, 피곤한 얼굴로 땅만 보고 걷던 직장인도 어느 순간 고개를 들고 주위를 바라보게 되었어. 나랑 똑같은 멍-한 표정으로 말이야. 왼쪽 벽에도 포스트잇, 오른쪽 벽에도 포스트잇, 천장에도 포스트잇. 바람이 불 때마다 슬픔이 소리 내며 함께 펄럭이는데, 그 날갯짓이 이 세상 것 같지가 않더라고. ……하나씩 계단을 오를 때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던 울음소리가 점점 뚜렷해졌어.


  밖으로 나오자 곧바로 노란 포스트잇을 보호하는 노란 폴리스라인이 보였어. 출구 옆 전봇대에는 정부를 질책하거나 주 예수를 홍보하는 전단지가 붙어져 있고, 이태원 1번 출구를 알리는 대의 밑단이 포스트잇으로 덮여 있더라. 그 모습이 꼭 꽃술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하철 입구를 둘러싸며 백국화가 수없이 놓여 있었어. 수천 송이쯤 될까? 그날따라 바람이 많이 불어서 꽃잎이 함께 흔들릴 때마다 파도의 포말이 터지는 것 같았어. 작고 조용히

  그리고 끊임없이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적혀 있는 수많은 포스트잇을 대포 카메라를 든 기자가 찍더라고.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는 어느 경찰과 어느 행인과 행인이었다가 잠시 멈춘 사람과 울고 있는 사람과 내가 있었어. 가족을 잃은 사람이 바닥에 앉은 채로 눈물을 흘려. 형이 여기에 없는 것처럼, 신도 여기에 없겠구나, 생각했지.


  울고 있는 사람이 절할 때마다 셔터 소리가 박수 소리처럼 따라왔어.

  포스트잇에는 사과가 많더라. 사랑한다는 말은 보이지가 않고.

  그들을 애써 바라보지 않으며, 대신 나는 사랑한다는 말이 적힌 포스트잇을 찾기 시작했지.


  국화 사이사이에 놓인 사진이 눈에 들어왔어. 문화가 다른 건지 사진 속 얼굴은 외국인이 대부분이었어.어쩌면 한국인 만큼 한국을 잘 아는 사람이 없어서일지도 몰라. 고인의 얼굴을 이곳에 놓으면 그대로 기자의 카메라를 타고 뉴스에 나가게 되리란 걸, 그 사진을 보며 안전 부주의로 죽은 이들을 왜 애도하냐는 날카로운 냉소가 쏘아지리란 걸 한국인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응, 그런 시대잖아.

  쉽게 웃고 쉽게 잊는.


  파란 조끼를 입은 자원봉사자는 포스트잇을 계속해서 붙이고 있었어.

  윤 정부 탄핵, 경찰청장 해임, 주 예수 믿으세요, 그리고.


[여기서 100미터 앞에 파출소 있음 ㅋㅋ]


  웃고 있는 사람까지.


  여러 이야기가 담긴 포스트잇도 보고, 여전히 울고 있는 사람도 보고, 선글라스를 껴서 표정이 어떤지 잘 모르겠는 경찰관도 봤어. 경찰관은 폴리스라인 앞에 서서 참사 현장을 등지고 하염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더라.


  그 골목은 좁았어.


  멀리서 봤을 때 그리 경사졌다고 느끼진 못했지만, 사람이 끝없이 몰려드는 상황이었다면 충분히 위험한 골목이 되리라 생각했지.


  애도를 위해 이태원역 1번 출구 뒷부분에 쌓아둔 음식이 자꾸 바람에 흩날려 날아갔어. 떡, 펜 케이크, 초코에몽, 술병과 담배, 국화, 고인의 사진과 물품이 산처럼 쌓여 있더라. 너무 많이 다친 것 같아. 꽃이 불탈까 국화 옆에 비치한 소화기가 너무 현실적이라 슬펐어.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주머니에 있던 껌 5개를 꺼내서 놓아봤지. 이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는 채로 나는 조용히 불타는 향초를 바라봤어. 연기가 태어났다가 금방 사라졌지.


  ……나는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아. 형 뿐만 아니라, 그냥 모든 것을.

  이해하진 못한 것 같아. 되려 의문만 가득 담고서 집으로 되돌아갔었지.


  계속 끊임없이 고민할 것 같아. 타인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어쩌면 우리가 다시 만날 그날까지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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