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방에게 밥주기

20시간을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시골빵

by 회색 유인원 시아




나의 하루는 르방(Levain)에게 밥을 주는 인사로 시작된다.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번

밀가루 한 숟갈, 물 한 숟갈. 매일 반복되는 이 작은 의식을 마치고 유리병을 창가에 올려. 겨울 햇살이 옅게 들어오는 주방, 르방은 어제보다 조금 더 빠르게 부풀어 오를 것이다. 아니면 조금 더 느릴 수도 있다. 오늘 온도와 습도는 어제와 다르니까.




이 녀석은 늘 나를 기다리게 하며 애태우게 만든다. 표면 위로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모습을 볼 때면, 늘 똑같은 감정이 밀려온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굳이 고르자면 '안도'에 가까울 것이다. '아 오늘도 잘 살아있구나. 오늘도 잘 버텨주었구나.' 고작 작은 유리병 하나에 이런 마음을 쏟는 게 조금 우습기도 하지만 매일 아침 이 확인이 없으면 이상하게 하루가 허전하다.


시작은 SNS에서 본 "르방 빵의 절대적인 맛"에 대한 예찬 때문이었다. 밀가루와 물 그 소박한 재료가 빚어낸 빵을 한 번 맛보면 다른 빵은 안 사 먹게 된다는 그 자신만만한 맛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르방을 키우겠다고 나선 게 벌써 몇 달째다.


나는 왜 매일 아침 가슴을 졸이며 유리병 속 르방의 상태를 살피는 걸까? 아마 직접 씨를 뿌리고 밭을 일궈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건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력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라는 걸.


새벽 문 앞까지 갓 구운 빵이 도착하는 시대다. 클릭 한 번이면 되는 편리함을 마다하고, 르방을 키우는 이유는 '서사'가 있는 빵을 먹고 싶었다. 빵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내 일상으로 다시 불러오고 싶었다.

나에게는 잃어버린 서사를 되찾는 첫 번째 움직임이 르방을 키우는 일이였다. 밀가루와 물만 섞으면 된다고 하니 이 얼마나 쉬운가!


그런데 전혀 쉬운게 아니였다. 자꾸 죽었다.

너무 뜨거운 물을 줘서 한 번, 너무 추워서 한번, 며칠 잊어버려서 한 번, 냉장고에 너무 오래 방치해서 한 번. 초반에는 거의 장례를 치렀다. 그때마다 새로 시작했고, 조금씩 배웠다. 이 녀석은 나의 성실함을 정직하게 반영한다. 어제 내가 얼마나 신경 써줬는지를 오늘 아침 기포의 숫자로 돌려준다. 속일 수가 없다.

처음에는 그게 부담스러웠다. 매일 챙겨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 약속이 잡혀 있는 날이면 온통 르방 밥줘야 한다는 생각에 집에 빨리 가고 싶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의무감이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셋으로 나눴다.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 그 중 '노동'이란 생물학적 생존을 위한 순환적인 돌봄이다. 밥을 먹고, 자고, 또 밥을 먹는 것처럼. 멈추는 순간 생명이 사멸하는 그런 헌신.

르방에게 밥을 주는 일이 딱 그렇다. 매일 해야 하고, 안 하면 죽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지극히 반복적인 노동이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이 작은 유리병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내가 무언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온다. 살아있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그게 아침을 시작하는 방법으로 꽤 괜찮다는 걸, 요즘 들어 새삼 느끼고 있다.


오늘은 깜빠뉴를 반죽하는 날이다. 20시간짜리 빵이라 할 수 있다.

아침에 르방 상태를 확인하고, 오후가 되어 본 반죽을 시작한다. 밀가루와 물, 잘 자란 르방을 섞고 오토리즈 1시간을 기다린다. 재료들의 첫 만남을 갖게 해 주는 시간이다. 그 다음 소금을 넣고, 애썼다고 바시나주 물을 조금 준다. 그리고 반죽을 한 다음 또 한시간을 기다린다. 그리고 1차 폴딩의 시간이다. 쎄게하면 글루텐 구조가 깨진다. 당연한 반응이다. 샤워도우는 강제로 주무르는 게 아니라, 반죽이 원하는 방향으로 다독여주는 것에 가깝게 아기 궁둥이 만지듯이 토닥이고, 접고, 기다리고, 또 접고. 그렇게 4차의 폴딩의 시간이 필요하다. 오토리즈와 폴딩이 끝나는 6시간 동안 나는 반죽 앞에서 지배자가 아닌 조율자가 된다.


그 감각이 좋다. 내가 뭔가를 만들고 있는 건지, 뭔가가 나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는 건지 모호한 그 경계. 인위적인 이스트라는 효율적인 지름길을 택하지 않고, 오직 밀가루와 물과 공기 중의 야생 효모만으로 작동하는 이 과정은, 내가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서 빨라지지 않는다. 결국 나는 속도를 내려놓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상하게 집중이 된다. 반죽의 탄성, 손바닥에 전해지는 온도, 밀가루 특유의 냄새. 이것들이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샤워도우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솔직한 거울이다.


6시간의 손길이 끝나면, 반죽을 냉장고에 넣는다. 이제부터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제서야 잠을 잘 수가 있고 개인적 일을 할 수가 있다. 이제 14시간 동안은 자연이 알아서 한다.


르방의 미생물들은 내 일정표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 속도로 숨을 쉰다. 빵이 부풀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강제로 멈춰 서게 된다. 서두를 수도 재촉할 수도 없다.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 사회는 속도를 통해 인간을 순환의 감옥에 가뒀다. 그러나 발효의 시간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다. 기다림이 고통이 아닌 설레임인 이유는 내가 기다리는 대상을 신뢰할 때다. 처음에는 실패를 줄이기 위해 인스턴트 이스트를 넣을까 말까 엄청난 고민도 했었다. 그 유혹을 뿌리치고 나는 르방을 신뢰하기로 했다. 14시간의 시간은 바로 르방을 믿게 만드는 기다림의 시간이였다. 그리고 그 신뢰를 배우는 게 생각보다 꽤 많은 것들을 바꿔놓는다는 걸 요즘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저온 숙성의 기다임, 자본의 속도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이 시간은, 어쩌면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러운 선물이다.




깜빠뉴. 프랑스어로 '시골', 혹은 '공동체'라는 뜻이다.

이탈리아에서는 파네 젠차 살레라 부르고, 독일에서는 로젠브로트라 부른다. 나라마다 이름은 달라도, 이 투박하고 거친 덩어리들은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척박한 땅의 기후와 그 땅을 일궈온 사람들이 수천 년간 맺어온 관계. 그 관계가 발효되어 굳어진 것이 바로 이 빵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 어딘가의 마을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르방을 들고 마을의 공동 오븐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집집마다 오븐이 있던 시절이 아니었으니까. 오븐이 달궈지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은 옆집 아주머니와 안부를 나누고, 서로의 반죽을 살피며 기술을 전수했다. 올해 밀은 어떤지, 누구 집 르방이 특히 건강한지, 어떤 온도에서 가장 잘 부풀어 오르는지, 빵이 구워지는 그 시간에 이웃의 안녕을 확인하고, 척박한 삶을 함께 버텨내는 하나의 돌봄공동체였다.


이제 그 공동 오븐은 사라졌다. 익명의 빵을 사며 익명의 위안을 얻는다. 그 사라진 서사의 향기를 되찾고 싶어 오늘도 르방을 키우고 발효를 기다리고, 재료가 스스로 단단한 구조를 세우기를 기다린다. 이스트의 힘을 빌려 강제로 부풀린 매끄러운 빵들 사이에서, 거칠고 산미 있는 이 시골빵을 고집하는 것은 내 나름의 작고 단단한 저항이다.


아침 르방에 밥을 주고 빵을 꺼낸다.

오븐에서 갓 나온 샤워도우는 껍질을 두드리면 텅, 하고 속이 빈 듯한 소리가 난다. 잘 구워진 증거다. 이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의 뿌듯함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아무도 없는 주방에서 혼자 "됐다" 하고 중얼거렸던 것도. 처음엔 돌덩이 같아서 열번은 버렸다. 지금도 속이 폭신하게 익었는지 잘 부풀어올라 쿠프가 이쁘게 나왔는지 늘 떨리는 순간이다.





아직 뜨거운 빵 앞에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르방에게 밥을 줬던 아침부터 지금까지, 20시간이 이 한 덩어리 안에 압축되어 있다. 내 손의 온기와, 기다린 시간과, 냉장고 안에서 자기 속도로 숨을 쉬었던 미생물들의 흔적과, 이걸 누군가와 나눠 먹고 싶다는 마음까지.

더치 오븐 뚜껑을 열었을 때 올라오는 그 냄새. 묘하게 시큼하면서도 구수한, 케러멜처럼 달달한 향은 세상 어떤 언어로도 정확히 설명이 안 되는 그 향기다. 이 냄새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냄새라고 생각한다. 어떤 향료도 첨가하지 않은, 오직 시간이 만들어낸 냄새.

이 단단한 껍질은 인간의 개입과 자연의 시간이 합작해낸 하나의 작은 세계다.


누군가는 고작 빵 한 덩이에 너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할 것이다. 맞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가성비의 잣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오직 시간과 정성만으로 정직한 맛을 내는 이 느린 빵을 굽는 행위는 나에게 꽤나 조용하고도 비장한 저항이다.

내가 구축한 작은 세계의 첫 번째 건축물이다.

르방을 보살피고 빵을 나누는 행위는 계산된 교환이 아니다. 그것은 조건 없는 투여이며,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는 행위다. 마을 공동 오븐 앞에 모인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을 상상해보는 즐거움, 그게 내가 이 긴 과정을 반복하는 진짜 이유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