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선의

by 록유

복잡한 통로에는 사람들이 가득 서 있었다. 주말 기차 안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들을 이리저리 밀쳐가며 내 자리를 찾아갔다. 미리 예약을 해 둔 터라 다행히 앉을 좌석이 있었다. 그런데 어쩌나! 겨우 찾아간 내 자리에는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다. 보풀이 살짝 일어난 외투와 낡은 치마를 입고 허리가 조금 굽은 할머니는 보퉁이를 안고 앉아 계셨다. 동대구에서 밀양까지. 45분쯤 걸리는 거리를 서서 가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다가 나는 서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앉아있는 할머니 옆에 서서 의자에 살짝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들이 예쁘게만 보였다. 겨울의 스산한 배경들에서 봄날의 향기가 뿜어나는 듯 했다. 입석으로 서서 가는 사람들로 기차 안은 꽉 차 있었지만, 내 마음은 뿌듯함으로 가득 차 나 혼자 여유를 누릴 수 있을 만큼 마음이 평화로웠다.

다음 역인 경산역에서 또 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탔다. 밀려오는 사람들 틈에서 서 있기가 불편했다. 아빠와 다섯 살 쯤 되어 보이는 꼬마가 내 자리로 가까이 다가왔다. 젊은 아빠는 할머니에게 표를 내보이며 자리에서 비켜달라고 했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깜짝 놀랐다.

아이의 아빠는 할머니를 일어나게 하고 자기 아이를 그 자리에 앉혔다. 나는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내 표를 보여주었다. 여긴 내 자리이고 내가 할머니께 자리를 양보한 것이라고 당당히 말을 했다. 아이의 아빠는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표를 보여 주었다. 그 표에는 행선지와 좌석이 적혀져 있었다. 나는 나의 표를 보여 주었다. 아이의 아빠는 나를 보며 물었다.

“이 기차는 부산으로 가는 기차인데요.”
“네! 저는 밀양까지 가요!”

그리고 나는 내 좌석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곤 내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건 동대구로 가는 표인데요.”

밀양 발 → 동대구 행.

그랬다. 나는 밀양으로 가는 기차를 예약한 것이 아니라 동대구로 가는 기차를 끊은 것이었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하행선 기차를 구매해야 하는데 거꾸로 가는 상행선 기차를 예매한 것이었다. 거꾸로 적힌 내 좌석표를 보고 당당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식은땀이 나려고 했다. 주변에서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수군수군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길잃은 아이처럼 당황했다.

“죄송해요. 제 자리가 아니네요.”

나는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표는 내 자리가 아니었던 거다. 내가 거꾸로 표를 끊은 것이었다. 나는 표도 없이 무임승차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잠시 말이 없던 아이의 아빠는 할머니에게 그냥 앉으시라고 하더니 건너편의 자기 좌석에서 아이를 무릎에 앉혀 조용히 앉아 갔다. 영문을 모르는 할머니는 무슨 일인가 하며 자리에 앉아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셨다. 주변은 조용해지고 기차는 미끄러지듯 겨울의 풍경 속을 달려갔다.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선의를 베풀었다며 만족해하던 내 마음은 한바탕 실수로 인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지만 피식 한번 웃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은 가벼워지기만 했다. 마음속에는 작은 위안이 샘솟았다. 어쨌든 할머니는 편안히 앉아 가시게 되었고, 무거운 다리를 잠시나마 쉬게 해 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나의 어설픈 친절이 할머니에게 닿았을까.

할머니는 그날 실수한 나를 어떻게 기억하실까.

구멍 많은 어떤 사람이 베푼 선의에 마음이 따뜻해지셨을까.

겨울 기차가 찬바람을 뚫고 달려나간다.

차가운 공기가 햇살에 따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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