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셀러레이터(AC)의 고객은 누구인가?

우리는 용역사인가, 투자사인가

by DW

나는 이제 막 1년차가 된 액셀러레이터(AC)다.

아직 배울게 많고 더 성장해야하는 새내기다.


그러다 문득, 최근에 이 질문을 진짜 많이 한다.
“액셀러레이터(AC)의 고객은 누구인가?”


처음 AC가 되었을 땐, 답이 너무 명확했다.
당연히 스타트업이었다.


투자하고, 보육하고, 함께 성장의 순간을 만들어가는 게 AC의 존재 이유라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1년 정도 현장에서 굴러보니, 이 질문이 점점 흔들리더라.

어느 순간부터 나는 스타트업보다 공공기관의 눈치를 더 보고 있었다.
사업비 집행 기준이 맞는지, 정산에 문제는 없는지, 용역 성과는 충족했는지…
하루의 절반을 공공기관의 프로젝트 관리에 쓰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투자사’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용역사’로 살고 있는가?”


1. 공공기관과 스타트업 사이, 그 어딘가에서 길을 잃다


액셀러레이터라는 직업은... 참 묘한 위치에 있다.
스타트업 생태계의 맨 앞에서 ‘혁신’을 외치면서도,
정작 매출의 대부분은 공공기관이 발주한 ‘액셀러레이팅 용역사업’으로 채워진다.


솔직히 말해보자.
AC 업계에서 공공기관 용역은 매출을 빠르고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나도 첫해에는 실적을 쌓아야 했기 때문에, 용역 공고만 뜨면 다 들여다보고,
가능하면 입찰했고, 밤새 제안서를 썼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진짜 고객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스타트업에게는 “우리는 당신들의 성장을 돕는 파트너예요!”라고 말하면서,
막상 하루 일과의 대부분은 공공기관 보고서와 계약서, 기획안 작성이었다.

그 사이에서 생기는 괴리가 꽤 컸다.



2. 우리는 용역사인가, 투자사인가


AC라는 직업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투자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

하지만 현실적으로 공공기관 용역으로 생존하는 조직

그러면서도 VC처럼 전문성과 투자 역량을 평가받아야 하는 조직

그러던 어느 날, 거울을 보며 진짜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나는 지금 ‘용역사’로 AC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투자사’로 AC를 하고 있는가?”


사실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아직 100%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하게 느끼는 건 하나다.


스타트업을 잊는 순간, AC는 AC가 아니다.


용역사업은 분명 중요하다.
운영비를 만들고, 조직을 유지하고,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스타트업’을 뒷전으로 두는 AC라면...
그건 AC가 아니라 그냥 “사업 대행사”에 더 가깝다.


기관 담당자는 대부분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 프로그램 KPI가 조금 높아서요, 창업팀 숫자만 좀 맞춰주시면 됩니다."
"기업 당 멘토링은 00회 맞춰주시고 나중에 최종 결과보고서 주실 때, 멘토링 보고서도 같이 주세요"
"이번에는 후속투자 유치 건수는 00회, 금액은 00억원 꼭 맞춰주세요."

이 물음의 대답은 항상 앵무새처럼 똑같았다.

"문제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루는 다른 담당자가 나에게 말했다.

“AC의 본질이 뭐냐면요, 결국 스타트업과 가장 가까운 업계 전문가여야 해요.
그런데 공공기관만 바라보고 있는 AC는… 그냥 용역 수행자죠.”

그 말을 듣는데, 뜨끔했다.

정말 내가 그러고 있었기 때문이다.



3. 진짜 고객은 누구였을까


최근에 한 초기 창업팀 대표와 밥을 먹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형, 사실 우리 같은 팀은 AC가 진짜 필요한데…
요즘 AC는 다 공공기관 사업하느라 너무 바빠서 우리를 제대로 보지도 않아요.”


순간 되게 미안했다.


이 친구는 그저 자기가 만든 서비스를 시장에 내놓고 싶어서,
밤새 개발하고, 디자인하고, 마케팅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AC가 그들을 만나줄 시간이 부족하다는 거다.


그날 이후로 ‘고객’이라는 단어를 다시 보게 되었다.

사업비를 주는 건 공공기관일지 몰라도,
내가 AC가 되기로 결심했던 이유는 스타트업 때문이었다.


내가 공감하고, 응원하고, 지원하고 싶었던 대상은
다름 아닌 창업자들이었다.

AC의 ‘진짜 고객’은 사실 너무 명확하다.


스타트업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도, 우리가 성장하는 이유도 결국 그들 때문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기관은 왜 AC에게 중요할까


여기서 현실적인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초기 AC에게 공공기관 사업은 거의 생명줄과도 같다.

운영비

인건비

투자재원 확보

팀 구성과 조직 유지

브랜드 인지도

네트워크 확대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게 대부분 공공기관 사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 고객은 스타트업’이라고 마음속으로는 외치면서도,
일정을 잡아보면 기관 보고서 마감이 더 우선될 때가 많다.


이게 AC 1년 차의 현실적인 고민이다.
멋있게 포장할 필요도 없다.
모순적이지만 이것이 업계의 구조다.


하지만 구조가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정체성마저 흔들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5. 나만의 해결책: 균형을 되찾기


나는 최근에 스스로 몇 가지 원칙을 만들었다.
(고작 1년 차지만, 나름의 생존 규칙이라고 할까?)


1) 공공기관 사업은 '수단', 스타트업은 '목적'이라고 매일 상기한다

책상 앞에 이렇게 적어놨다. “스타트업이 없으면 AC도 없다.”


2) 최소 주 20%는 스타트업 미팅에 쓴다

정산 보고서를 미뤄서가 아니라,
스타트업을 잊지 않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3) AC의 핵심 역량은 결국 ‘투자 역량’이다

용역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좋은 팀을 발굴하고 성장시키는 건 아무나 못 한다.


4) 기관도 결국 스타트업과 가까운 AC를 원한다

기관 담당자들도 안다.
스타트업을 모르는 AC는 껍데기라는 걸.


5) 스타트업도 AC를 고객으로 본다

AC가 진정성을 갖고 스타트업과 관계를 쌓으면,

그들도 우리를 필요한 파트너로 인정한다.


나는 이 원칙들을 지키면서
조금씩 ‘액셀러레이터’로서의 정체성을 찾아보려고 한다.


물론 아직도 가끔 흔들린다.
용역 보고서 마감이 몰리면 다시 “나는 용역사인가?” 같은 고민을 한다.


하지만 최소한 방향만큼은 분명해졌다.



6.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목표


나는 아직도 완성된 AC가 아니다.


여전히 배우고 있고, 현장에서 깨지고, 매일 고민한다.
모르는 것도 많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히 알게 됐다.

AC의 고객은 결국 스타트업이다.
그 사실을 잊는 순간 AC는 AC가 아니다.


앞으로 나는
공공기관과 스타트업 사이에서 흔들리더라도,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를 절대 잊지 않으려고 한다.


스타트업을 가장 가까이에서 응원하고,
현장에서 같이 뛰고,
그들의 문제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AC.


그게 내가 되고 싶은 AC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