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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미래가 불안할 때, 과학을 생각한다는 건

아이는 줄고, 어르신은 늘고,
나는 불안하다

요즘 포털 뉴스나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한 번쯤은 봤을 거다.

'출산율 0.72명', '지금 태어나는 아이는 전교생이 혼자일 수 있다', '2050년 한국 인구 반토막 위기' 같은 제목들. 자극적이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다.

어쩌면 너무 자주 봐서, 혹은 그 안에 뭔가 진실이 있다고 느껴서일지도 모른다.


처음엔 ‘그래도 설마’ 하고 넘겼던 기사들이, 점점 피부로 와닿는다.

요즘 주위만 봐도 아이 울음소리는 귀해지고, 출산 대신 반려동물을 택한 친구들의 이야기가 더 익숙해진다. 그리고 동시에, 지하철에서, 마트에서, 병원 대기실에서 고령자의 숫자는 확실히 늘고 있다.

이렇게 변해가는 사회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이 나라에서 어떻게 아이를 낳아?”

“노인만 사는 세상이 올 텐데, 미래가 너무 무서워.”


이건 단지 저출산과 고령화에 대한 통계 데이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정서 상태를 드러내는 말이다. 미래에 대한 불신, 사회적 고립감, 그리고 '내가 뭘 해도 달라질 게 없다'는 무기력.


이런 감정들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기술이 우리를 구해줄까?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불안할까

기술 낙관론은 언제나 유혹적이다. AI 돌봄 로봇, 무인 자율주행차, 초고령 사회에 맞춘 스마트 헬스케어 시스템, 그리고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대비하는 대체 기술들. 이런 이야기들은 종종 다큐멘터리나 유튜브 영상에서 그럴싸하게 소개된다. 하지만 문제는 기술 자체에 있는 게 아니다.

이런 기술이 실제로 개발되고 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다는 점이다.


왜일까? 어쩌면 우리가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돌봄 로봇이 있어도 “엄마를 기계에 맡긴다고?”라는 마음의 장벽은 쉽게 넘을 수 없다.

자율주행 모드가 상용화되어도 “기계에 목숨을 맡긴다고?” 하는 불안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 기술은 충분히 앞서가는데, 사람의 마음은 그 자리에 멈춰 있는 장면이 자주 보인다.


그 간극. 나는 그 간극이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가 놓치고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과학문화는 기술을 믿게 하는
‘사회적 공감대’


과학문화라는 단어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어렵게 느낀다.

'과학을 잘 알아야 하는 건가?' '과학자들 이야기 아니야?' 하고 고개를 젓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과학문화는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과학문화란, 기술 그 자체보다 그 기술을 둘러싼 ‘믿음의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어떤 기술이 왜 만들어졌고, 어떤 원리로 작동하며, 그 기술이 어떤 사람들의 손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고, 질문하고, 이야기하는 문화.


그런 문화를 경험한 사람은, 기술을 단순히 '기계'로 보지 않는다. 그건 내가 함께 이해하고, 실험해 보고, 다듬어갈 수 있는 '함께 쓰는 도구'가 된다.

즉, 과학문화는 기술에 대한 ‘기능적 신뢰’가 아니라 ‘사회적 신뢰’를 만드는 과정이다.

‘이걸 누가 만들었고, 나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허용되는 사회.

그게 바로 과학문화가 확산된 사회다.


문제를 '피할 수 없는 운명'에서
'함께 풀어볼 과제'로

어쩌면 우리가 진짜 두려운 건, 기술이 부족한 게 아니라 ‘이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나라들은 많지만, 모두가 동일한 정서를 공유하지는 않는다. 어떤 곳은 낙관적이고, 어떤 곳은 두렵고, 어떤 곳은 무기력하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올까?

나는 그 차이가, 문제를 대하는 사회적 태도에서 온다고 믿는다.

그 태도를 구성하는 데 중요한 게 바로 ‘과학적 사고방식’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이걸 바꾸기 위해 어떤 시도들이 있을까?”

“나도 작게나마 뭔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단지 과학 시간에 배우는 게 아니라, 삶의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럴 때, 저출산과 고령화는 ‘재앙’이 아니라 함께 풀어볼 수 있는 복잡한 퍼즐이 된다.

그 퍼즐을 풀기 위해 필요한 건, 새로운 기술도 중요하지만, 그 기술을 함께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과학은 답이 아니라,
함께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다

과학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과학문화가 마치 만능 해결사인 것처럼 보이길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과학이라는 언어는, 문제를 보는 시선을 조금 다르게 만들어 준다.


무력감 대신 탐구심을,

단절 대신 대화를,

두려움 대신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


그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기술과 사람이 멀어지지 않고, 우리 사회가 위기를 이야기할 수 있는 방식을 더 많이 갖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해결’이라는 단어보다 ‘이해’라는 단어에 마음이 끌린다.

당장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도, 함께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은 덜 외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이해'의 첫걸음이 과학문화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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