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가식 서가숙
요즘 짱구에 푹 빠져있다. 예의 ‘짱구는 못말려’도 물론 무척 좋아하지만, 이번에는 그쪽이 아니라 과자 ’짱구‘ 쪽이다. 이상하게 자꾸 생각난다. 밥을 먹고 나면 생각나는 담배처럼. 나는 담배는 안 피우니까 대신에 짱구를 먹는다. 까지는 아니라도 이제 짱구 과자를 먹는 것은 나에게 매일의 일과처럼 슬쩍 자리잡아 버렸다. 몇 개씩 사서 쟁여 두어도 금방 떨어진다. 혹시 여자친구가 와서 몰래 먹고 가는 것인지도. 흐음, 물론 다 내가 먹은거겠죠.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채워나가고 있는 지금도 무릎맡에 삼양의 과자 봉투가 잘랑잘랑 마라카스 같은 경쾌한 소리를 내고 있다. 아이스 커피의 달그락 거리는 얼음처럼 기분 좋은 소리다. 오늘의 띠부띠부씰은 짱구의 영원한 라이벌 ’치타(본명 카와무라 야스오)‘. 자신감 넘치고 쿨해서 특히 좋아하는 캐릭터다. 어제는 유리, 그 전에는 철수. 흰둥이는 대체 언제 나올까.
다들 그거 아시는지. 원래 과자 짱구의 모델은 지금의 그 크레용 신짱이 아니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종종 짱구 과자를 사먹었지만 과자의 모델이 바뀐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쩐지 어느샌가 바뀌어 버린 짱구를 나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잊고 있던 약속이 퍼뜩 떠오르듯 문득 과자를 먹는 중에 묘한 미시감을 느꼈다. 과자를 씹는 와드득와드득 소리가 어렴풋한 기억을 불러온 지도 모른다. 대체 짱구 과자의 모델은 언제부터 크레용 신짱이 되어버린 것일까. 기억하기로 원조 짱구의 모델은 캡 모자를 뒤로 비뚜름하게 쓰고, 모자보다도 비뚜름한 표정을 지닌 장난꾸러기 캐릭터였다. 그것이 시니컬한 원조 짱구이자 삼양의 프렌차이즈 모델이었던 것이다. 빅뱅의 거짓말 이전에 지오디의 거짓말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의 짱구 이전에 원조 짱구가 있었다. 전해져 내려오는 하나의 짱구 전설처럼.
나무 위키에 검색해 보니 짱구는 1973년부터 기성 세대를 거쳐 우리 과자의 원조격으로 그 역사를 면면하게 이어오고 있다. 지금의 짱구가 과자 모델을 하게 된 것은 약 20년 정도. 소문에 따르면 실제로 과자 짱구는 여러 제과 회사의 표절과 소송으로 얼룩진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엄청난 자본의 원리와 이런저런 소송에 떠밀려서 우리의 퉁명스런 원조 짱구 캐릭터는 마치 당연한 수순처럼 역사 속의 한 귀퉁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오래된 추억 속에 어렴풋 남겨진 옛 연예인처럼.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와작와작 짱구 과자를 먹으면서 그 귀염성 없던 짱구를 문득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90년대에 태어난 전세계의 아이들은 알게 모르게 해리포터의 영향을 받고 자라왔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우리들에게 단순한 소설을 넘어서 상상력이라는 것의 활동 지반을 마련해주는 하나의 기초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일종의 꿈과 현실을 연결하는 파이프 라인으로서 마법사 이야기를 열렬하게 신봉했었다. 뒤이어 나온 영화 시리즈는 막연히 존재하기만 하던 꿈이 마치 현실화 되어 나타난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해리포터 ‘마법사의 돌’을 영화로 보며 나는 그것이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미래 세상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래서 나는 ‘덤블도어’ 역의 배우가 바뀌었다는 사실이 좀처럼 자연럽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어느날 하루 아침에 바뀌어 버린듯 굉장히 기묘한 감각이다. 영화의 인물들은 전혀 다른 사람에게 ‘덤블도어 교수님’이라고 부른다. 더군다나 그것을 보고 있는 관객들도 어쩐 일인지 그것을 모두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듯한 분위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 뒤로 나는 해리포터에 대한 열렬함까지도 팍삭 식어버렸지 싶다. 혹은 그것은 그저 내가 나이가 들어버렸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세상은 온갖 ’모르는 사이에‘ 바뀌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것도 조금 바뀌는 것이 아니라 뒤집힌 티셔츠처럼 생판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그야말로 상전벽해 능곡지변이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한강이 바다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국가의 이름이 바뀐다고 할지라도 손쉽게 받아들여 버릴지도 모른다. 요즘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것들은 사회에 통용되는 규칙이 되고 자연스러운 밈이 되곤 한다. 처음에는 진지하게 대국민 몰래 카메라는 아닐까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세상은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 가는 것이다. 몇 번이나 그런 어리둥절하던 경험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편안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그것은 이해라기보다는 하나의 포기와도 비슷한 인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결국 살아가는 것은 개인적인 영역에서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하루 아침에, 심지어는 몇 분 만에 누군가의 마음이 정반대로 뒤바뀐다고 해서 우리는 매번 그를 탓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은 맞지만 내일은 틀리는 일은 언제나 존재한다. 결과의 엄중함과 결론의 냉혹함에 이유를 찾지 않는 것.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런 것들을 그저 감내해 나가는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짱구의 캐릭터처럼, 덤블도어 교수님처럼,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진 옛 연예인처럼, 꿈과 현실이 명백히 구분지어진 것처럼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별다른 인과도 없었을지 모르겠다. 는 생각을 텅 비어버린 과자 봉지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그 많던 짱구는 대체 누가 다 먹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