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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Feb 12. 2023

책장은 무겁다

동가식 서가숙



  누군가의 집에 놀러가서 책장을 구경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주변에서는 하도 ‘책 볼 시간 없다’ 라며 투덜대길래 독서와는 다들 완전히 담을 쌓고 지내는가 했었다. 그렇지만 그 누구의 집에 놀러 가건 적어도 ‘요즘 읽고 있는 책’ 한두 권정도는 다들 쟁여두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한 권을 읽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책의 중간에 그만둬 버린 것이 머쓱하여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건 사람들은 다들 어디선가 자신만의 페이스대로 적당히 책을 읽고들 있는 것이다. 만약 예외가 있다면 바로 갓난쟁이를 키우고 있는 가정. 그 정도는 되어야 소설책 페이지를 한 장 넘길 시간 조차 없는 모양이다. 역시 육아란 그정도로 엄청난 것이다.

  누군가의 책장을 구경하는 것은 왠지 그의 내밀한 속마음을 들춰보는 기분이 든다. 마치 은밀한 속옷 취향을 우연히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다. 라고 하면 변태 같이 들리지만 어쩐지 정말 그런 기분이 든다. 예컨대 평소 가벼운 화제의 이야기나 헛소리만 해대는 친구 집에서 때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발견한다든가 빅토르 위고의 전집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때면 왠지 봐서는 안될 것을 훔쳐본 심정이 된다. 이 친구가 대외적으로 선보이고 있는 바보같은 컨셉과 빅토르 위고 사이에는 지구와 달의 거리만큼 크나큰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시 사람들은 언제나 밖으로 내어 보여주는 것보다 내면 속에서 더 거대하고 깊은 세상을 착실히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심정이야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만약 누군가가 몰래 서랍 깊은 곳에 성인 만화나 이상한 내용의 장서를 한가득 소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취향이나 내면의 지극한 일부분일 뿐이다.


  나는 그다지 견실한 장서가라고는 할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주거 공간이 좁아서 주기적으로 책을 처분하고 정리해야 한다. 그런 슬픈 사정으로 결국 우리 집에 남겨진 책들은 첫째, 산지 얼마 지나지 않았거나 둘째, 오래 두고 자주 보는 책들 뿐이다. 지금 책장에 있는 것은 최근에 구매했던 위화의 원청, 뉴욕 3부작, 김연수와 한강의 몇몇 저작들로 주로 소설책들이다. 내가 보관하고 있는 책은 앉은 자리에서도 모두 한눈에 볼 수 있다. 책을 찾으려고 ’여기 어디 쯤 있었는데‘ 하는 상황은 없다. 어딘가에 숨겨둘 정도의 책이라면 이미 누군가에게 줘버렸거나 본가의 거대한 책장 구석에 몰래 넣어뒀다. 다시 보고 싶을 때면 리스트를 작성해 두었다가 몰아서 꺼내온다. 손때가 타고 헤지고 낑겨져 잊혀져버린 그 책들은 마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시골에 맡긴 강아지를 대하듯 아련하다. 다음에 더 큰집으로 이사가면 데려와야지. 그렇지만 내가 그 책들을 다시 데려올 수 있을까. 아마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현재 우리 집에는 누군가 놀러오면 부담없이 빌려줄 수 있는 책들이 모인 장소가 따로 있다. 당분간은 꺼내 볼 일이 없는 책들이다. 두꺼운 사회 과학책은 한 번 읽고나면 다시 꺼내려면 상당한 시간과 결심이 필요하다. 마치 탈진하며 간신히 정복한 높은 고산과 같다. 그래서 그런 책들은 읽은 뒤에 하루빨리 어딘가로 적당히 처분해 버린다. ‘다시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하며 떠맡기듯 빌려주곤 한다. 그렇지만 이상한 변덕이 생겨서 빌려줬던 책이 갑자기 보고 싶어지는 때도 있다. 갑자기 단 음식이 참을 수 없이 먹고 싶어지는 것처럼 갑자기 울컥 그런 마음이 솟구친다. 당장에 연락해서 ’혹시 그 책 다 봤니.’ 라고 묻고 싶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물어볼 수는 없다. 실은 전에 몇 번 물어봤다가 서로 민망해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 눈물을 머금고 다시 구매를 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실은 우리 집에도 빌린 책이 몇 권인가 있다.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도 있고 누군가의 책도 몇 권 있다. 문제는 그런 책 중에서도 받자 마자 휘리릭 끝내버린 책이 있는 반면 어쩐지 표지부터 쉽게 넘기지 못하는 책들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다지 책에 관한한 편협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쩐지 어떤 책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쉽사리 펼쳐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보통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았거나 어딘가에서 빌려 온 책들이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물건을 유통하는 도매상처럼 작가와 나 사이에 어떤 중개인이 낀다는 사실이 단순히 어색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빌려온 것들은 그책을 보기 전에 빌려준 사람을 먼저 떠올리고, 그 사람과 그 책의 관계나 어떠한 영향에 대해서 잠시간 생각해보게 된다. 비록 그것은 굉장히 짧은 순간일 뿐이지만, 그 짧은 순간은 책을 집어들게 하는 어떤 충동적인 욕구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기에는 충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떠한 책을 읽고 싶다는 자발적인 마음이 먼저 생기고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어딘가에서 막히게 되면, 나는 차라리 그런 껄끄러운 기분이 들지 않는 다른 책부터 집어들게 되는 것이다. 라는 것이 나의 하나의 추측이다. 더군다나 스스로가 아닌 타인이 선택해 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독서에 있어서 자발성을 얼마간 희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에게 독서란 모름지기 타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내가 읽고 싶은 때에 내가 읽고 싶은 만큼’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니까.


  내가 다니는 직장 정문에 이런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정말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책이 만든 사람이란 대체 어떤 사람일까.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자란 아이는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까. 작가 한강의 책을 읽으면 세심한 감성과 상처를 더듬는 사람이, 김영하의 책을 읽으면 이지적이고 도회적인 사람이 된다는 뜻인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가끔 집으로 누군가를 초대하면 나의 책장을 보고는 ‘역시 이 작가를 좋아하는구나.’ 라고 말하곤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당연히 무척 놀란다. 어째서 그것은 그에게 ‘역시’ 인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장에 꽂혀진 책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내가 자는 사이에 책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 것인지 작당모의를 하고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이렇다 할 기준도 의미도 없이 이책 저책을 읽어 오면서 결국 어떤 사람이 되어버린걸까. 혹시 내가 이렇게나 제멋대로인 데다가 남의 의견도 듣지 않는 까다로운 사람이 된것도 전부 그런 식으로 책을 읽어왔기 때문은 아닐까. 마치 제목을 따라서 인생이 흘러간다는 가수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다. 어쩌면 나는 책을 빌리고 빌려주는 일에 얼마간 신중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지난번에 책 ‘인생은 실전이다’ 를 선물해 준 친구는 대체 무슨 의도였을까요. 흐음, 왠지 찝찝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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