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가식 서가숙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학창시절 유행했던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으니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바로 10원짜리 동전을 가지고 고물상에 찾아가면 50원으로 바꿔준다는 이야기. 90년대에 만든 동전은 구리인지 주석인지 하는 어떤 성분이 특히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렇다는 구체적인 설명까지 있었다. 당시 우리들은 자동차 엠블럼을 떼어가서 고물상에 팔아 먹는다거나 샤프 연필 홀더를 모아서 가져가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뜬소문을 철석같이 믿어대던 시절이라, 이 흉흉한 소문은 당연한듯이 우리 사이에 확고한 사실로 자리잡아 버렸다. 마치 컵 떡볶이는 500원이고 수업 시간에 떠들면 손바닥을 맞는다는 것이 하나의 당연한 사실로서 여겨졌던 것처럼.
실제로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은행에 가서 만원권 지폐를 모두 10원 동전으로 바꾸어 거금 5만원을 벌었다는 전설이 우리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퍼져 있었다. 그렇지만 모든 풍문이 그렇듯 실제로 주위에서 그 기적을 행했던 사람은 없었다. 간단히 진위 여부를 확인 할 수 있고 쏠쏠한 용돈 벌이도 되는 일을 우리는 왠지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다. 고물상이 대체 어디 위치하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 일지도 모르고, 은행에 직접 가서 10원짜리를 무더기로 바꿔달라고 요구 할만한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저 단순하게 그런 시시한 일 외에도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도무지 짬이 나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게 무엇일지 지금으로서는 좀체 짐작도 가지 않지만.
과연 그 괴소문은 정말이었을까. 과거로 돌아가면 비트 코인이 아니라 10원짜리 동전을 좀더 긁어 모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는 이제 더는 현금을, 그리고 10원짜리는 더더욱, 자주 사용하지 않으니 진위 여부의 확인은 점점 더 요원해지고 있다. 혹시 당시에 정말로 바꿔본 사람 있나요. 해외에 나와서 오랜만에 주머니 가득 동전을 넣고 짤랑짤랑 돌아다니고 있으려니, 어릴적에 소중히 동전을 모아서 문방구로 뛰어가던 기억이 알알이 떠오르곤 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통화는 당연히 달러화다. 유일무이한 기축 통화. 때문에 각국에서 찍어내는 화폐의 기준도 자연스레 달러의 방식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역사적 인사나 명적을 지폐 오른쪽에 그려 넣고 왼쪽 위에는 숫자로 화폐의 값어치를 적는다.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숨겨둔 몇 가지의 문양을 새기고 복잡한 공정으로 만든 전용지를 쓴다. 만약 미국 달러 지폐를 하트 모양이나 별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각 국에서는 어쩔수 없이 하트와 별 모양의 지폐를 만들지 않았을까.
그렇게 화폐라는 것은 그 나라에서 공식적이고 대외적으로 추구하는 유무형의 가치를 쉽게 드러낼 수 있는 상징이다. 압축된 암호문처럼 화폐 속에는 다양한 메시지를 꾸깃꾸깃 담아낸다. 예컨데 베트남의 동에는 당연히 호치민 아저씨가 그려져 있고, 태국 바트에는 선대 국왕의 젊은 모습과 불교 사원들이 촘촘하게 그려져 있다. 달러에는 건국의 아버지들과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려져 있다. 각국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화폐를 구경하는 것은 언제나 여행객에게 쏠쏠한 즐거움을 주곤 하는 것이다. 카드를 들고다니며 긁는 것과는 다르게 지폐를 사용하는 것에는 무언가 직접적인 실감이 있다. 소비하고 있다는 직관적인 충족감이 있고 돈을 주고 받으며 확실하게 서비스를 구매한다는 개념이 있다. 해외로 나가서 두툼한 지폐를 들고 있다는 감각은 언제나, 정도는 조금씩 다를지언정, 여행자를 얼마간 고양시키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사용해 본 화폐 중 가장 지루했던 것은 단연코 유로화다. 2등도 3등도 없는 여지 없이 깔끔한 단독 1등. 유로 지폐에는 어느 나라의 것인지도 모를 구시대의 유적이 그려져 있다. 5유로나 10유로나 심지어 50유로도 그저 숫자와 색깔로만 구분 될 정도로 특색도 재미도 없다. 고만고만한 그림체로 그린 폐허같은 유적에 고만고만 칙칙한 색상이다. 더군다나 작은 단위 주제에 실제는 굉장한 고가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야 도무지 쓰는 맛이 없다.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서 계산을 하고 있으면, 그 얇은 지폐 한장이 지닌 엄청난 가치에 문득 당혹스러워진다. '이렇게 작은 종이 하나에 우리들은 쩔쩔매고 사는구나.' 하고 여행지까지 와서 현실적인 푸념을 하게 되는 것이다. 1유로를 내고 공중 화장실을 한번 이용하고 나면 그렇게 허무한 소비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이 세상은 언제부터 돈을 내고 볼일을 보게 된걸까. 혹시 유로 국가들은 서로서로 평화롭게 지내는 것에 급급해서 화폐 따위에는 별 관심도 없었던 걸까. 여행객이 편안한 마음으로 설렁설렁 길거리를 짤랑짤랑대며 돌아다닐 수 있는 배려가 부족하다. 아무리 그래도 낭만적인 버스킹을 구경하고 던지는 동전 하나가 1500원이라니 너무하죠.
이어서 다른 화폐 이야기 하나. 얼마전 일본 여행을 위해서 환전을 했다. 엔화 지폐는 원화와 종이 질도 크기도 전혀 다르다. 일본의 엔에는 마치 과거 버블 경제의 화려한 몰락을 비유하듯 어딘지 세월의 흔적을 품고 바래진 느낌이 든다. 전체적인 명채도가 두 눈금 정도 내려가 있다. 천엔 지폐에는 소가 핥은 듯한 머리를 한 호남형의 남성이 그려져있다. 그는 과연 누굴까. 5천엔에는 깔끔한 헤어라인과 단호한 입매를 지닌 여성이 그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엔화 역시 '역사적 인물'과 '장방형 모양'이라는 지폐 공식을 착실하게 따르고 있다. 몇 년전 어머니가 일본 여행을 다녀오면서 남겨둔 엔화를 이번에 챙겨가서 사용 했는데, 문제는 거기에 2천엔권이 있었다는 것이다. 2천엔권에는 특정한 인물이 아닌 고위 관료로 추정되는 일본화와 운치있는 필체로 적힌 시구가 적혀있다. 그것이 왜 문제인가. 그것이 문제가 된 이유는 이제는 일본에서 더이상 발행하지 않는 지폐라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사실을 알리 없다. 도착하고 이틀 뒤에 여행용 가방을 하나 구매하기 위해서 2천엔권 다발을 꺼내자, 친절하던 점원이 수상한 분위기를 띤다. 점장도 오고 종작에는 직원들이 모두 모여서 상의도 하고 위조 검사까지 마친 뒤에야 계산을 할 수 있었다. 사실 2천엔권 보다 일반 옷가게가 위조 검사기까지 구비하고 있는 것이 훨씬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본인들에게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역시 무섭도록 철저한 민족이다. 새삼 경탄스럽다. 그 뒤로도 여행 중에 탭바에서 맥주 값을 치를 때나 카페처럼 여기저기에서도 직원들과 심지어는 손님까지 모여서 지폐를 구경하는 일도 몇 번인가 있었다. 그것은 어쩐지 나보다 훨씬 많은 관심을 받는 귀여운 애완동물을 데리고 산책나온 기분이다. 이정도면 일본 정부에서도 재발행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 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뉴스를 보니 아르헨티나에서는 월드컵 우승 기념으로 리오넬 메시를 화폐에 넣겠다고 하던데 정말일까. 정식으로 발행되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 아르헨티나로 떠날지도 모른다. 지폐의 상징으로 꼭 역사적인 인물이나 민족적인 의미를 지닌 것을 선정해야만 하는 걸까. 지폐의 가치는 단지 적혀있는 숫자만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현금에 귀여운 동물 캐릭터를 넣자는 의견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지만,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 것 같다. 천원 권에는 늠름한 진돗개. 오천원 권에는 호랑이. 만원 권에는 해치. 괜찮지 않나요. 모름지기 그 나라를 대표하는 지폐라면 다른 나라에서 봤을 때도 모으고 싶거나 그렇지 않다면 반대로 굉장히 쓰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메시 지폐처럼 올해는 BTS 기념 지폐를 대량으로 생산한다면 대한민국의 화폐 가치는 원화 품귀 현상을 타고 천정부지로 치솟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나라도 다시 지폐가 활발하게 쓰이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흐음. 어쩌면 지폐에 무엇이 그려져 있건, 재질이나 모양이 어떠하건 그저 돈이라면 다 좋은걸까. 아마 그런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