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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Mar 18. 2023

공동의 팀을 결성 하는 일

동가식 서가숙

 

  위로. 라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렇지 않나요. 매번 위로를 할 때마다 몇번이고 고민하게 된다. 어떤 말투로 말을 건네야 할지 무슨 단어를 사용해야 할지 쉽게 확신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표정 같은 것도 신경써야 하고 대답하는 타이밍도 신경써야 한다. 더 꺼내놓고 싶은 말이나 감정이 아직 남았는데 섣부르게 위로를 했다가 서로 머쓱해 졌던 일도 몇번인가 있다. 그러면 ’징징댈 맛‘이 떨어진다고 할까. 예를 들어 '오늘 팀장님이 일을 산더미처럼 줘서 너무 힘들었어.' 라는 말에 곧바로 ’힘들겠다. 맛있는거 먹어야 겠네.’라고 위로 했더니, 그것은 단지 서론이고 뒤이어 답답하고 속상한 일들을 줄줄이 쏟아 내기라도 한다면, 나는 분명 더 다양하고 심심한 위로의 말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앵무새처럼 언제까지고 계속 ’맛있는거 먹어야겠네.‘ 라고 반복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고 그런 말을 계속 했다가는 ’내가 돼지야? 왜 자꾸 맛있는 거만 먹으라고 하는거야.‘ 라며 총구가 되려 나에게 돌아올 위험성도 존재한다. 땀 삐질삐질. 장전된 총알은 반드시 발사 되어야 한다고 했던가.


  지금은 그나마 수월해졌지만, 예전에는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게 무척 버거운 일이었다. 위로를 받고 싶은 사람은 현재 감정적 편향 상태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위로’를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바로 편파성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압도적인 편파성. 그런데 나는 그런 편파 판정이 도무지 익숙치가 않아서 자주 삐걱거리곤 했다. 양측의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고 판단하는 일이 불공정한 처사라고 생각해서 그랬지만 ‘남자가 돼서 하나하나 따지다니 쪼잔해!’라는 말을 들었다. 삐질삐질. 그 뒤로 ‘흐음.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나쁜 사람이다.’ 라는 연극조의 어줍잖은 멘트를 지나서 이제는 꽤나 뻔뻔하고 편파적으로 위로의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그 사람 뇌가 없나보네.' 이런 식으로. 그런데 또 무조건적으로 편을 들면 나중에 되려 민망해지는 경우도 몇 번이나 겪었으니, 역시나 위로라는 것은 참 어렵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도 속으로는 모든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해야 한다. 라고 확고하게 생각하고 있다. 소리내서 말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자연스러운 위로를 건네는 사람을 보면 무척 부러워 하게 된다. 신기하게도 상황과 감정 상태에 딱 들어맞는 적절한 위로의 말을 그야말로 적절한 타이밍에 슬쩍 건넨다. 상대방이 슬퍼하면 같이 슬퍼해주고 화를 내줘야 할 때는 풀무질을 하듯이 보조를 맞춰 같이 화를 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런 일련의 과정을 힘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해낸다는 것이다. 노래에 맞춰 자연스러운 안무를 추는 타고난 댄서처럼. 감정의 흐름을 읽어 내고 보조를 맞추는 모습은 어쩐지 율동적으로 보여서 '위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아마도 그런 것은 하나의 타고난 재능의 영역일지도 모르겠다.


  ‘50/50’라는 영화가 있다. 주연은 아담 역의 조셉 고든 레빗.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서 않아서 우리 주인공 아담의 애인은 금세 바람이 나서 떠나버린다. (왠지 고든은 신기할 정도로 이런 ‘버림 받는 남자 역할’이 언제나 무척 잘 어울린다.) 설상가상 이라고 해야 할지. 아담은 생존률 50퍼센트, 그러니까 사망률 50퍼센트의 희귀암 판정까지 받게 된다. 물론 이런 경우 50대 50은 전혀 공평한 확률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와 정신적인 쇠약으로 아담은 점점 자제를 잃어가고, 결국 주변 사람들에게도 못되게 대하고 자학적으로 군다. 그에게는 조금 모자라 보이는 절친 카일이 있다. 배우는 세스 로건. (그도 ‘조금 모자라 보이는 역할’의 대가다.) 영화 내내 카일은 아담을 따라다니며 속 터지는 짓을 한다. 그가 하는 말들은 전혀 위로 같은 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서 수술 전날. 둘은 평소처럼 시간을 보내고 카일은 혼자 술에 취해버린다. 아담은 별 수 없이 낑낑대며 카일을 집까지 데려다 줘야 한다. 침대에 던지듯 눕혀두고 집에 가려던 찰나, 아담은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것은 ‘페이싱 캔서 투게더(함께 암 이겨내기)'라는 제목의 책. 펼쳐 보니 여기저기 공부한 흔적에 군데군데 줄도 쳐져있다. 아마도 위로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일까. 어떤 위로는 받고 나서야 그것이 필요했음을 비로소 깨닫고 만다. 그런 형태의 우연한 위로를 받지 못했다면 아담은 아마도 밤새 뒤척이며 불안에 떨었을 것이다. 다음 날 병원에 들어가는 아담을 안아주며 카일은 말한다. 끝나고 보자. 고마워. 수술의 결과는? 50대 50의 확률입니다.

  이 영화를 언제 어디서 봤었는지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꿉꿉한 곰팡내가 벽지처럼 늘어 붙은 고시원에서 삐걱대는 의자에 앉아서, TV 볼륨을 최대한 줄이고 미지근한 맥주를 홀짝이며 봤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방의 상태도 끔찍하고 개인적으로도 낯선 지역에 막 발령 받은 뒤라서 어쩌면 조금 울적한 기분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양치를 하고 누웠을 때, 나도 조금은 위로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페이싱 캔서 투게더. 위로라는 것은 책의 제목 그대로 암에 맞서 공동의 팀을 결성하는 일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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