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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Aug 04. 2023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으면 좀체 알 수 없는

플라뇌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으면 좀체 알 수 없는

     

  요즘이야 자기소개에 MBTI가 들어갈 정도로 자기 성향에 관한 분석이 일반화되었다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스스로 자신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예를 들면, 외향형인지 내향형인지, 계획적인지 즉흥적인지 일일이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혹은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것이란 원래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으면 좀체 알 수 없는 법이다.     


  나는 자신을 ‘객관화’ 한다는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사실 잘 모른다. 그래도, 만약 이것도 개인이 지니는 하나의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면, 나는 상당히 ’주관적‘인 성향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 식’대로 하지 않으면 뭐든지 진심으로 대할 수가 없다. 밥을 먹고 운전을 하고 책을 읽고 노래를 듣고 글을 쓰는 모든 잡다하고 사소한 일들까지 포함해서 마음대로 하지 못하면 무척 스트레스를 받고 의욕이 꺾인다. 워낙에 그렇다보니 객관성을 판단하는 성격 유형 검사에는 그다지 관심도 믿음도 없었다. 성화에 못이겨 검사를 해보고 유형이 나오면(참고로 나는 INTP 유형이다) ‘그래서 지금 이걸로 뭘 어쩌자는 거야'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선지 그 호들갑 떠는 축제 같은 분위기에 도무지 발맞춰 즐길 수가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스스로 인생에서 한참 동안을 상당히 외향적인 사람으로 생각해왔다. 실재로 학창 시절에는 여러 친구들과도 두루두루 어울렸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것도 별로 싫지 않았다. 그래서 20살 무렵, 우연한 기회에 양복점에서 일하게 됐을 때 나는 그것이 너무나 손쉬운 일거리라고 생각했다. 신세계 백화점에 위치하고 삼성에서 야심차게 중년층을 타겟으로 런칭한 신생 브랜드였다. 나는 무슨 자신감인지 ’지나가는 어른들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고, 잘 꿰어내서 하루에 바지 한 두개 파는 것쯤’은 간단히 해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일을 시작한 첫날 교육을 받고 손님들을 마주하자 입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나가는 중년의 어르신들에게 ’손님, 들어 와서 보셔요'’안녕하세요. ㅇㅇㅇㅇ양복 입니다. 혹시 찾는 물건 있으신가요?’ 기껏 연습해 놓고 막상 손님이 두리번거리며 다가오면 나도 멀뚱멀뚱 쳐다만 봤다. 인사를 건네는 것조차 왠지 미련하고 적절치 못한 행위처럼 느껴졌다. 지나가는 손님들의 행동과 표정을 살피고, 기분을 생각해보고, 내가 말을 거는 것의 당위를 따져보고 있었다. 이 사람은 과연 ‘중년’일까. 말을 걸기에 가장 적절한 거리는 얼마쯤일까. 뭐 그런 생각들. 그러는 사이에 손님들은 당연히 쌩하니 지나가 버린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제자리에 서서 들고 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동상과 다름 없는 취급을 받고 있을 때면, 실은 저 사람들에게는 내가 안 보이는 건 아닐까. 하는 현실적이고 진지한 고민에 빠지고 만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당연하게도 판매 실적은 최악이었다. 판매 실적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기록이다. 반년 동안 내가 ‘단독으로’ 팔았던 것은 겨우 바지 두 벌과 넥타이 하나 뿐. 더군다나 아무리 연습해도 깔끔하고 정확하게 셔츠를 포장하고 바지를 거는 일이 손에 익지 않았다. 특히 수트라는 것의 특성상 진열이 생명인데, 내가 정리한 옷들은 새옷도 헌옷처럼 보이는 통에 무척 속을 썩였다. 내가 정리정돈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옷가게에서 일을 하는 동안 절절하게 배운 두번째 교훈이다. 그때 부단히 연습한 덕분에 지금도 바지 쯤은 정확하고 멋지게 갤 수 있다. 아직도 화 한번 내지 않고, 차분하고 젠틀한 목소리로 매번 다시 알려주던 점장님의 말투가 떠오른다. 죄송한 마음에 일을 그만둔 뒤로 아버지 선물을 사러 몇 번 들렀었다. 늦었지만 죄송합니다. 덕분에 사회란 녹록치 않다는 것을 열심히 배웠다.     


  대학생 시절 나는 여러가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잘 맞는 일도 있었고 그저 그런 일들도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와플 장사‘. 백화점 식품관에 입점한 고급 와플 가게로 사장님도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즐거운 곳이었다. 일이 끝나면 같이 남아서 크림 맛도 시험하고 반죽의 배합도 같이 고민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안 들어도 되고,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임시 직원 주제에 새벽 같이 출근해서 설거지도 하고, 반죽도 재워놓고, 크림도 잔뜩 만들어 케이스에 진열 해둔다. 효율적으로 와플을 굽는법도 생각해 내고 새로운 직원이 오면 옆에 붙어서 전담 교육도 했다. 이렇게 말하긴 조금 민망하지만, 아르바이트 생 치고는 꽤나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개점 전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갓 구운 버터 와플 향을 솔솔 맡고 있을 때면 그 잠시간의 여유가 썩 행복하게 느껴졌다. 방학도 끝나고 역시 일도 끝나갈 무렵, 소주 한 잔을 하면서 사장님이 ‘월급을 많이 줄테니 정식으로 같이 일 해보는게 어떻겠니'라며 진지하게 제안해왔다. 대학교 1학년 생이 받기에는 과분하게 많은 월급이었다. 며칠 간 고민 끝에 거절했지만, 그때 내가 ’와플맨‘이 되었다면 지금도 어디선가 버터 냄새를 맡으며 열심히 와플을 굽고 있지 않았을까.     


  결국 나는 나의 성향에 대해서 몇 가지 배워 알고 있다. 반복된 실수와 오해 끝에, 내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하고 부끄러움도 많이 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올해의 판매 사원’ 같은 것은 도저히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꽤나 근면하고 성실한 편이다. 무언가 결정되면 더이상 따지지 않고 일단 행동에 옮겨 나간다. 아마도 뒤에서 묵묵히 무언가 제 역할을 해나가는 일에 적합하다. 이런 성향들은 내가 직접 몸으로 경험하며 배운 것이므로, MBTI 성격 유형 검사 같은 것과는 다르다. ‘나는 내향형이니까 세일즈 같은 것에는 맞지 않아’ 라고 지레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직접 부딪히고 고통 받아가며 터득한 것이다.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실수나 실패없이 무언가를 손쉽게 배울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MBTI란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서 ‘미리’ 이해하고 존중하는, 그를 통해 상처를 덜 주고 받는 쿠션 역할을 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다치면서 배울 수 밖에 없는 것들도 아마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까, 조금은 생각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는 전혀 공감하지 않지만, ‘기왕 아플거라면 청춘‘인 편이 조금 낫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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