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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Aug 04. 2023

애완동물론

플라뇌르

애완동물론     


  요즘은 어쩐지 애완동물이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동물권 운동의 일환으로 애완동물이라는 용어 대신 반려동물을 사용합시다. 하는 의견이 꾸물꾸물 새싹처럼 솟아나더니 급속도로 언어 생태계를 잠식하여 일순 완고하게 자리잡아 버렸다. 덕분에 ‘애완’이라는 말은 이제 ‘편의적이고 임의적인’ 의미를 조금 품게 되었다. 그래서 애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사랑이라는 뜻이 있음에도, 동물에 대하여 도구적이고 폭력적인 입장을 지닌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요컨대 이제는 ‘반려는 맞고 애완은 틀리다’가 정론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부족하나마 글을 쓰는 입장이니까, 역시 단어 선택이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가족만큼 소중한 의미를 지닌 동물에게는 애완동물 보다는 반려동물이라고 하는 쪽이 더 적절한 선택이라고 절감한다. 그렇지만 역시 올바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의 중요성 만큼이나 다양한 단어의 사용도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심지어 그것이 임의적이고, 편향적이고, 폭력적인 단어라 할지라도 예외를 둘 수는 없다. 단어에는 단어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으니까. 그 단어의 사용자를 비판하고 무시하면 될 일이지 애초 ‘그 단어는 잘못됐으니까 사용하지마’라고 입을 막는 것은 이차적인 폭력과 검열성을 낳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반려’라는 단어가 득세하자 벌써부터 ‘반려 식물’이나 ‘반려 자동차’, ‘반려 칼’ 심지어는 ‘반려 성인 용품’이라는 혼종 용어까지 나오면서 그 의미가 변질되고 있다. 다용도란 용어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혐오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문제는 나처럼 무언가를 키우는 재능에 있어서 완전히 저주받은 ‘네거티브 인간’은 도무지 ’반려‘로 삼아 무언가를 키울 수 없다는 것이다. 올해만 해도 여지껏 해바라기 2회, 케일 1회, 장수풍뎅이 1회(아, 슬픈 오해가 있었다), 카네이션 1회로 상당히 많은 생명을 떠나보내야했다. 적어도 반려라고 칭하고자 한다면 ’절대적인 양의 일정 기간과 애정‘을 전제해야 하는데, 나에게는 도무지 그럴 시간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살아있는 것을 책임지고 스스로 키워내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 심장이 콩닥콩닥 떨리고 자신감을 잃는다. 화분 같은 것을 선물로 받으면 ‘얘도 곧 떠나겠지’ 하고 지레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순간부터는 죽어도 그다지 마음에 타격이 없는 일시적 애완 생물만을 키우게 된다.


  아마도 ’반려동물만이 옳다'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그것은 키운 기간이 아니라 마음 가짐의 문제‘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매번 반려자를 들이는 심정으로 식물과 동물을 키우다간 나 같은 사람은 심장이 너덜너덜 전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나도 식물을 죽이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나름 성심성의껏 온 정성을 다해서 키웠지만 결과적으로 ‘연쇄 살식마’가 어느새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취급은 역시 조금 억울하다. 그런고로 나는 ‘반려’라는 용어가 너무 무겁게 느껴지는 이들을 대표해서 ‘애완동물’이라는 용어를 당당히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바이다. 흠, 너무 뻔뻔한가.     


  그러던 차에 나는 최근에 나에게 딱 맞는 애완동물을 아무래도 찾은 것 같다. 바로 대로변에 위치한 소형 수족관 카페에서. 그 ‘아쿠아리움 카페’라는 곳은 내가 산책하는 들목에 위치해 있어서 왠지 걸음을 멈추고 구경하게 된다. 처음에는 물고기 보다도 거북이들이 일광욕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는데, 점점 안쪽에 위치한 희귀 어종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팔랑팔랑 요염하게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것이 바로 관상용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매혹되고 만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구석자리에 위치한 애기 복어들이 마음에 쏙 들어왔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 ’궁극의 애완동물‘이 있다면 바로 복어가 아닐까 하고.     


  내 이론은 간단하다. 우선 집에 적당한 수조를 들인다. 그리고 복어를 키운다. 왜 하필 복어냐고 묻겠지. 하지만 꼭 복어가 아니어도 괜찮다. 새우나 꽁치나 문어라도 문제없다. 조건은 단 두 가지면 충분하다. 첫째, 귀엽거나 아름답거나 이쁘거나 아무튼 그 물고기가 마음에 들 것. 둘째,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식용이 가능할 것. 물론 ‘나는 복어나 문어는 생김새부터 징그럽고 싫어!’ 하는 분이 있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고양이나 강아지도 절대 싫다는 사람도 많으니까, 그것은 단지 취향의 문제다. 어쨌거나 나는 복어나 문어를 무척 귀엽고 우아하다고 생각하니까 상관없다. 덧붙이자면, 우리가 평소 횟집에서 보는 거무튀튀하고 칙칙한 꽁치나 문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애완용의 아름다운 꽁치와 문어도 있으니까 취향껏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선 보통의 동물들과 똑같이 마음과 애정을 다하여 보살펴주고 교감을 나눈다. 그렇게 일단 몇 달이건 몇 년이건 귀엽고 사랑스런 물고기와 사이좋게 지낸다. 그렇지만 슬프게도 그들의 수명은 충분할 정도로 길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가 보통 애완동물과는 다른 점인데, 그 애완 물고기가 죽으면 최대한 정성스럽게 요리를 해서 먹는 것이다. 최선의 존중과 예우로 요리해 줄 수 있는 셰프도 부르고, 그동안 ‘꽁돌이 꽁순이‘를 아끼던 주변 지인들에게 비보도 알린다. 그리고 집에 오손도손 모여서 일종의 경건한 장례식을 치른다.     

  누군가는 이것이 야만적이고 반인륜적인 처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만약 충분히 세심하고 쿨하게 이뤄진다면 거기에는 ‘이상적 애완동물’에 대한 가능성이 존재 한다고, 진지하게 생각한다. 세상에는 어린 시절 겪었던 반려 동물에 대한 이별 트라우마로 새로운 동물을 들이는 것에 주저하는 사람들이 수두룩 하다. 물론 인간은 깊고 소중한 ‘반려’ 관계를 통하여 그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귀중한 교훈을 얻지만, 때로는 적당한 ‘애완’ 관계에서도 분명 깨닫는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모든 관계가 반드시 치명적으로 ‘반려’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는 지금 ‘모든 반려동물이 죽으면 먹어 버리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반려자로서의 동물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는 사람들을 위해서, 단순히 ‘애완동물’에 관한 대안을 하나 제시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인간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이와 비슷한 식인 풍습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하는 가족이나 애완 동물을 무책임하게 땅에 유기하고 좀벌레들이 파먹도록 방치는 것이 오히려 끔찍하고 야만적인 처사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가족과 애완 동물의 시체를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요리하여 천천히 먹었다. 그들에게 식인이란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의 일신과 인생 그 자체를 자신들의 신체와 영혼 속에 흡수하고 포함시키는 제사 과정이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추하고 미개한 문화라고 손가락질 할 수는 없다. 분명히 다시 강조하는데, 나는 소중한 가족이 죽으면 먹자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반려동물의 사체를 먹는다‘는 개념은 ‘가족을 먹는 것’과 동일하게 끔찍한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반려자나 반려동물의 죽음에 대한 충분히 합리적인 장례 방식과 응당의 예절이 존재한다. 고인을 먹는 것보다는 훨씬 성스럽고 합리적인 방식이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장례 방식으로 선택하고 있다. 강아지나 고양이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면 적절한 절차가 마련되어 있다. 전문 업체도 있고, 병원에서 소각처리 하는 방법도 있다. 그렇지만 그 외 파충류나 물고기처럼 일반적인 가이드 라인이 명확히 나와있지 않는 상황에서 그것은 무척 난감한 일이다. 그들을 위한 만족스러운 조언은 어디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니까 애정을 가지고 복어를 키운 사람들은 ‘애완 복어’가 죽고 나서 뜰채로 건져내는 순간, 조금 전만 해도 소중한 애완동물이던 그것은 이제 처리해야 할 무언가로 변해 버린 것이다. 삶을 전부 내던질 정도는 아니지만 분명 눈물이 흐르고 가슴이 아플 것이다. 더군다나 애완동물의 죽음이 슬픈 만큼이나 그에 합당한 장례 방법이 없다는 것 또한 주인으로서는 무척 끔찍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소중했던 존재를 당연히 뒤뜰에 대충 파묻거나 쓰레기 통에 버릴 수는 없다. 동물 장례 회사를 불러 처리하는 방법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새우나 복어의 장례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경우 ‘애완동물’과의 이별을 조금은 차분하고 적당한 분위기로 진행해도 괜찮지 않을까. 만약 장례 식사를 한다면 애완 물고기의 죽음을 ’진지하게 여기는 쪽'에서도 참석하여 합당한 방식으로 애도를 표할 수 있고, ’고작 생선 주제에 무슨 호들갑이야'하는 입장에서도 단순히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호적이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 복어가 어릴 때 볼 빵빵 애교를 부리면 참 깜찍했는데'하면서 나름의 추억을 나눌 수도 있다. 생전의 사진이나 영상을 나눠 보는 것도 좋겠다. 그렇게 애완 물고기라는 애매한 용어에 걸맞게 슬픈듯 유쾌한듯 감성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그런 애매모호한 분위기 속에서 명복을 빌어주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별이란 언제나 ‘썩 나쁘지 않은’ 정도 만으로도 분명 엄청난 성공 아닐까. 라고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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