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말 Aug 04. 2023

그런 카페는 없지 않을까

플라뇌르

그런 카페는 없지 않을까          


  누구든지 카페를 선택하는 어떠한 기준 같은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커피가 맛있거나 알바생이 예뻐야 한다거나 하는 그런 기준. 의자가 편해야 한다거나 디카페인을 팔아야 한다거나 하는 기준들. 지금껏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이들과 카페에 갔고, 종종 선호하는 카페의 기준 같은 것을 물어봤다. 그러면 조금 생각해 보고는 분명 몇 가지씩은 다들 이야기해주곤 한다. 한 가지도 말하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카페는 그만큼 필수적이고 필연적인 공간이라는 뜻이 아닐까.     


  어떤 기준이 있다고 한다면 개중에는 포기하지 못할 기준도 있을 것이다. 마치 연애 상대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다. 재력은 어느 정도, 학벌은 어느 정도, 외모는 어느 정도. 타협할 것은 얼마간 타협한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못하는 것도 분명 있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뭐 이런 기준이 다있어’라고 고개를 갸웃거릴만한 기준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다시 비유해보면, 연애 상대를 고르는 것처럼 카페를 고르는 것 또한 철저하게 개인적 기호의 영역인 것이다. 누구든 그가 가진 유별난 취향을 고쳐야 한다고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은 없다. 심지어 누군가가 미지근하고 오래된 커피를 선호한다고 말할지라도 말이다.     


  개인적인 취향의 영역에서 나의 카페 선택 기준은 꽤나 심플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우선 테이블의 다리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왠지 테이블이 불안하게 흔들리면 괜스레 마음까지 불편해져 버린다. 그리고 기왕이면 지나치게 시끄럽지 않아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차분히 앉아서 무언가를 생각할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 그런 카페를 찾게된다. 그렇지만 물론, 조금 더 말해보라고 한다면, 사실 끝없이 이어서 말할 수도 있다. 커다란 통창에 계절꽃이 가득한 정원이 있고, 갓 볶은 원두에서는 향긋한 산미가 느껴지며, 의자는 편안하고 자리는 널찍하고, 고상한 뿔테를 쓴 사장님은 기품있는 웃음을 띄우고 말도 걸지 않으면서, 화장실은 청결하고, 벽난로에는 단단한 참나무 장작이 타닥타닥, 상냥한 샴 고양이가 낮잠을 자고, 수제 티라미수가 있고, 듣기 좋은 쿨재즈가 나직하게 흘러 나온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일종의 궁극의 카페다. 하지만 그런 카페는 이번 생에는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흠.     


  나는 주로 글을 집에서 쓰는 편이지만, 가끔은 카페에서 글을 쓰기도 한다. 작업실처럼 집에 온갖 물품을 구비해 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굳이 밖으로 나갈 이유는 없다. 찬장에 신선한 원두도 있고 도넛이나 과자도 잔뜩 쌓아뒀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배달만으로도 어찌어찌 해결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며칠이나 틀어 박혀서 타닥타닥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으면 어딘지 조금 이상해진다. 왠지 스스로 웅덩이에 고인 빗물처럼 느껴진다. 잘못한 것은 없지만 잘못한 기분이 든다. 점점 현실 감각이 무뎌지고 내면이 편향되어 가는 것이 느껴진다. 기름칠하지 않은 골동 자전거처럼 어딘가 삐거걱 거린다. 우리집 해바라기가 시들어 죽은 것도 결국엔 내가 이렇게 고여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라는 비감한 생각들도 먼지처럼 들러 붙는다.     


  말할 것도 없이, 매일 글을 쓴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매번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자세로 글을 쓰고 게다가 매일 같은 식사를 하고 커피와 디저트 메뉴까지 똑같아져 버리면 글을 쓰는 일은 한층 더 고된 일이 된다. 그런 지겨운 삶을 사는 주제에 재밌는 무언가를 쓰고 싶어 하는 것도 어쩌면 무척 건방진 태도라는 생각까지 든다. 때로는 집에 틀어 박혀있는 사이에 밖에서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는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든다. 마치 용궁에 초대받아서 산해진미를 대접 받고 궁녀와 노닥거리다 보니 뭍에서는 100년이나 지나가 버렸다는 심마니 이야기처럼. 아니, 심마니가 아니라 나무꾼이었던가. 이제는 그런 것도 점점 헷갈리기 시작한다. 현관문을 보며 조용히 중얼중얼 말을 해본다. 여기 사람 있어요. 창을 열고 환기를 시키고 웃어 보고 스트레칭을 해봐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머리 안쪽에 먹장구름이 젖은 솜처럼 들어찼다. 그러면 나는 슬슬 생각한다. 밖으로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신선한 공기를 잔뜩 들이 마실 때가 됐군.


  그럴 때면 나는 카페를 찾는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내가 원하는 기준을 충족하는 카페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일반적인 카페에는 아름다운 정원도 산미 가득한 원두도 뿔테 쓴 고상한 사장님도 참나무 장작불도 샴 고양이도 없다. 적어도 차분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카페도 그리 많지 않다. 다들 유행하는 팝을 스피커로 빵빵 크게 틀어 놓고 그게 아니면 사람이 빵빵 시끄럽게 군다. 유행하는 베이글을 먹고 거울 앞에 줄을 서서 셀피를 찍는다. 물론 그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은 유행하는 노래를 신나게 틀고 마음 놓고 떠들 수 있는 카페를 찾아 왔을 뿐이다. 단지 취향이 다를 뿐. 오히려 내 쪽이 불청객인 것이다. 나는 그렇게 정착지를 잃어버린 실향민처럼 단골 카페를 찾아 떠돌고 있다. 훌쩍훌쩍. 왠지 서럽다. 역시 유토피아는 그저 전설로만 존재하는 것일까. 카페 유토피아. 어쩌면 여기저기에서 카페가 우후죽순 생겨 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에 부합하는 카페를 결국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나처럼 도저히 단골 카페를 찾아내지 못해서 ‘이럴 바에야 내가 만들자’ 하고 결심들을 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카페 사장님들은 자신이 꿈꾸던 유토피아적인 카페를 구현해 내는 데에 성공했을까. 아니면 이데아는 역시 이데아일 뿐인걸까. 참 어려운 문제다. 가끔 나에게 인생은 결국 정확히 받아들여질 공간을 찾는 귀착의 과정처럼 느껴진다. 궁극의 카페 이데아. 우리가 그것을 뭐라고 부르건, 그것은 오로지 관념적으로만 존재하는 소내의 장소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애완동물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