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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Aug 04. 2023

세계 어쩌고의 날

플라뇌르

세계 어쩌고의 날     


  오늘(6월 17일)은 ‘세계 사막화 방지의 날‘이라고 한다. 얼마 전에도 ’세계 어쩌고의 날‘이었던 것 같은데 하는 기분이 들어서 찾아보니, 바로 6월 14일이 ‘세계 헌혈자의 날’이었다고 한다.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헌혈의 유용과 필요성을 미디어에서 열심히 홍보했던 기억도 있다. 흐음, 찾아보니 6월만 해도 이런 기념일들이 꽉꽉 들어차 있다. 6월 1일은 ‘세계 우유의 날’이고 5일은 ‘세계 환경의 날’이라고 한다. 20일은 ‘세계 난민의 날’이니까 우리는 거의 주간 행사처럼 ‘세계 어쩌고의 날’이 정해져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거 아무래도 좀 이상하지 않나요.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세계 어쩌고의 날’이라는 것은 할로윈이나 발렌타인 데이처럼 역사와 전통이 있는 여타 기념일들과는 분명 다르다. 만들어진 의도는 잘 알겠으나 명확한 행동 지침이나 실행 같은 것이 없어서 어쩐지 밍숭맹숭하고 허탈하게 느껴진다. 예컨대 발렌타인 데이에는 ‘초콜릿을 나눠준다’라는 명확한 행동 지침이 있고 할로윈에는 ‘분장을 하고 파티를 즐긴다’라는 가시적인 실행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세계 어쩌고의 날’이란 대부분 ‘무언가를 보호합시다!’ 라거나 ‘이것을 신경 써주세요!’라고 크게 소리만 외치다가 ‘자, 이정도 소리쳤으니 속 시원하죠? 홍보도 끝났고 슬슬 집으로 돌아갑시다'라는 인상이다. 때로 작위적이고 억지스럽게 느껴져 취미가 취미의 장난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이런 ’기념일‘들의 목록을 찬찬히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이렇게 세세한 것까지 정해서 어쩌자는 걸까. 하는 의문도 들고. 어떤 것들은 이름만 보면 ‘그래서 뭐, 어쩌자고?'하는 반발심이 절로 고개를 든다. 이렇게 된 김에 내가 발견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세계 어쩌고의 날' 리스트를 몇 가지 적어보려 한다. 먼저, 3월 23일은 ’세계 기상의 날‘, 7월 28일은 ‘세계 간염의 날’, 10월 14일은 ‘세계 표준의 날’이다. 이런건 도무지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서 ‘그래서 뭐, 어쩌자고’ 하는 의문이 든다. 이어서 10월 16일은 세계 식량의 날이고 다음 날인 17일은 세계 빈곤 퇴치의 날이다. 이건 아무래도 조금 조잡하다고 느껴지는 경우다. 물론 모두가 세계적으로 중대한 문제는 맞지만 하루 차이로 강조하는 것은 조금 피곤하다. 이런 것들이 한두개가 아니라서 보고 있으면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된다. 이 세상은 정말 하루도 쉬지 않고 복잡해지고만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동물의 날’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로 많은가 하면 대충 아무거나 생각나는 동물의 종류, 예컨대 펭귄이나 기린 같은 것을 골라서, ‘세계 땡땡의 날’ 이라고 치면 십중팔구 이미 존재하고 있다. ’세계 개구리의 날'이라든가 ‘세계 코끼리의 날’도 있다. 심지어 침팬지, 원숭이, 고릴라, 오랑우탄, 보노보 등 영장류의 날들은 각각 나뉘어 있다. 고양이, 강아지는 말할 것도 없겠죠. 가장 끔찍한 것은 ‘세계 모기의 날’인데, 이쯤 되니 ‘세계 돈벌레의 날‘도 머지않아 제정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우리는 15세기 유럽에서 식민지 척식이 횡행하던 시대처럼, 날짜들을 차례로 선점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런 모습은 마치 대항해 시대에 멋대로 깃발을 꽂고 ’우리 땅'이라며 토착민들을 밀어내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아프리카 오지의 어떤 부족은 오랜 옛날부터 저마다 소소한 전통 행사를 매년 기념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미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는 해마다 집돼지를 도축하여 잔치를 여는 ‘집돼지의 날’이 있었는데, 마침 그날이 ’세계 돼지의 날‘과 겹치는 바람에 이제는 행사 진행에 눈치를 보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함부로 ’세계‘라는 말을 앞에 붙이는 사고 방식이란 역시 식민 개척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뉴스에서 미국 사람들이 돈을 내고 ’달나라 땅‘을 분양 받았다는 기사를 봤었는데, 그때 느꼈던 황당한 심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대체 어느 공인 단체에서 ‘세계 어쩌고의 날’을 선정하고 관리하는 것일까. 라는 것이다. 뜬금 없이 내가 ’12월 30일은 세계 눈사람의 날입니다'라고 공표한다고 해서 쉽게 인정해주지는 않을텐데. 흐음, 아마도 이런 과정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 우선 ‘전세계 기념일을 관리하는 권위 있는 기관이 존재한다’ 라고 가정해야 한다. 물론 미국이나 영국이나 스위스에 있겠지. 이제 한 시민 단체에서 이 ’기념일 관리 기관‘에 전화로 문의하는 것이다. ’저기, 6월 19일은 세계 바퀴벌레의 날로 기념하고 싶은데요. 허락해주시죠'라고 요청하면 ’죄송합니다만 그 날은 이미 세계 비키니의 날입니다. 21일은 비어있는데 그 날로 해드릴까요?'하면서 착착 새로운 세계의 날을 생산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우리 나라도 하루 빨리 날짜를 선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조바심도 든다. ’세계 불고기의 날‘이나 ’세계 BTS의 날'같은 것을 만들어 당장 문화 산업 활성화에 앞장 서야 하는 것이다.     


  다만 조금 걱정이 되는 것은 이렇게 급속도로 ‘세계 어쩌고의 날’이 증식되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기념하지 않는 평범한 날들’이란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매일이 ‘의미있는 축제’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딱히 나쁠 것도 없나 싶지만, 그래서야 ’기념‘이라는 것이 의의가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이건 마치 여자 친구가 ’오늘 무슨 날이게?'라고 물어서 ’흐음, 글쎄. 잘 모르겠는데’ 했더니 ’처음 떡볶이를 같이 먹은지 300일째 되는 날이잖아. 어떻게 그런 것도 몰라?'라며 진지하게 화를 내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내 입장에서 마냥 웃어 넘길 수만은 없는 것이, 나처럼 부주의한 인간은 우연히 제주도에서 말고기 스테이크를 먹었더니 하필 그날이 ‘세계 말의 날’이다, 같은 상황이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말 보호 단체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꼭 이런 날까지 말고기를 먹어야겠냐’라며 맹비난을 퍼부을지도 모른다. 또 ‘세계 돌고래의 날’에 우연히 돌핀쇼를 보러 갔다가 잔뜩 신난 사진이 뉴스에 실려버려서, 나는 ’일부러' 돌고래의 날을 골라서 돌핀쇼를 구경하는 악마로 낙인 찍히는 것이다. 이러다가는 초미세먼지를 확인하는 것처럼, 아침마다 ‘세계 어쩌고의 날’이니까 주의해야지. 라며 신경쓰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문득 모두가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기념일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오늘은 ’세계 편식의 날‘이다. 라고 무작정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만큼은 죄의식 없이 먹고 싶은 것만 쏙쏙 골라 먹으며 편식을 즐긴다. 만약 운 좋게 마음 맞는 사람을 규합할 수도 있다면 금상첨화다. 잠이 부족한 사람들을 모아서 ’세계 늦잠의 날‘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당일 다같이 늦잠을 자는 것이다. ‘세계 늦잠의 날’에 늦잠을 자는 사람은 평소처럼 ’게으르다‘라고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날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착실한' 시민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되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활동하는 사람을 보면 ’오늘은 세계 늦잠의 날이란 말이야. 이 상식도 없는 사람아!’라고 큰소리로 마음껏, 마음속으로, 외치는 것이다. 회사에 지각해서 상사가 ’자네 오늘 왜 늦었는가,’ 라고 추궁하면 ‘잘 모르시나 본데, 오늘은 세계 늦잠의 날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도 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뒷감당은 알아서 해야겠지만.


  그나저나 ‘세계 휴가의 날’ 같은 게 있으면 참 좋겠네요. 다들 같은 날 쉬어서 오히려 복잡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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