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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Aug 04. 2023

4시에 부타동이 먹고 싶어지면

플라뇌르

4시에 부타동이 먹고 싶어지면          


  불현듯 떠오른 생각. 혹시 브레이크 타임(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만 장사를 하는 음식점을 있다면 어떨까 싶다. 다른 식당들이 영업을 쉬기 시작할 때 역으로 장사를 시작해서 5시까지만 잠깐 장사를 하고 땡치는 식으로 식당을 만드는 것이다. 그야말로 경쟁 상대가 없는 궁극의 ‘니치’ 라고 할 수 있다. 참 기발한 아이디어 같지 않나요. 아니라고요? 한번 들어보시길.     


  세상에는 분명 어쩔 수 없는 특별한 사정으로 3시 이후에만 식사를 해야하는 사람이 있다. 그날따라 거래처 회의가 길어졌다거나, 늦은 아침을 먹고 뒤늦게 배가 고프다거나, 애인과 식사 중에 싸워서 거의 못먹고 나왔다거나, 까무룩 낮잠에 빠져서 3시 이후에 일어났다거나. 하는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만약 ’1일 1식’을 실천 중인 사람이 있다면 하루 중 식사를 하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는 바로 3시쯤 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런저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때때로 3시 이후에 식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늦은 점심 혹은 이른 저녁을 먹는 사람들은 왠지 ‘억울한’ 마음에 대충 때우자 하는 마음은 좀체 들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요즘 인기 많고 손님이 궁하지 않은 유명 식당들은 보통 3시부터 5시까지 ‘준비 시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따로 고민할 거리도 없다. 근처에서 장사가 잘되는 유명 식당의 메뉴를 그대로 가져오면 된다. 우선 시장 조사 겸 인기 식당에 찾아간다. 사장님을 불러다가 ’앞으로 이 옆에서 식당을 좀 하려는데’ 말을 꺼내면, 사장님은 분명 몸에 구멍이라도 뚫을 기세로 눈을 흘기고 경계심에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울 것이다. 그럴 때 씨익 웃으며 ‘경계하지 말아라. 나는 평화적인 사람이라 경쟁은 모른다. 사장님이 쉴 동안에만 장사를 할테니 비법을 좀 전수해달라’ 라고 하면 그제야 사장님도 마음을 누그러트리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실 지도 모른다. 유명한 식당의 주변에는 언제나 브레이크 타임에 걸려서 쓸쓸히 발걸음을 돌리는 손님들이 많이 있다. 마침 그 옆에 ‘자회사’처럼 비슷한 음식를 내오는 곳이 있다면, 맛집 사장님 입장에서도 손님을 돌려보내는 안쓰러움과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주인 좋고 손님 좋고.     


  전에 후쿠오카의 유후인 지역에 갔을 때 실수로 ‘가이세키 정식’ 예약에 실패해서 지역의 식당을 전부 돌아다닌 적이 있다. 구글맵에 있는 모든 가이세키 식당에 찾아가서 사정을 설명했지만 모조리 예약이 가득차 있어서 결국 동네 이자카야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됐다. 뭐, 결과적으로 가이세키는 생각도 안날 정도로 끝내주게 맛있는 식당이었지만. 저녁을 먹으면서도 ’여기에서 가이세키 식당을 한다면 누구든지 대박 나겠군'하는 생각을 했었다. 더군다나 여기 식당들도 다들 같은 시간에 쉬고 있는 것 같으니 ’브레이크 타임 전용'가이세키 정식이 있다면 분명 인기가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십여년 전만해도 ‘중간 휴식’이라는 개념은 서양 문화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다가 ‘브레이크 타임’이라는 것이 세련되고 합리적인 요식 문화라는 인식이 어느샌가 퍼졌고, 식당들은 기다렸다는듯 너도나도 ’브레이크 타임‘을 내걸고 쉬기 시작했다. 마치 어딘가에 모여서 동시에 다들 합의한 것처럼. 장거리로 국내 여행을 하다보면 체크인을 마치고 숙소에서 잠깐 쉬면 3시를 넘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출출해져서 옷을 입고 동네를 설렁설렁 돌아다니고 있으면 보통의 유명한 식당들은 하나같이 문을 걸어 닫고 저녁 장사를 준비하고 있다. 결국 별 수 없이 카페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거나 맥도날드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에 가곤 한다. 그런 경험을 몇 번인가 하고 나면 ‘어째서 다들 같은 시간에 쉬는 걸까'하고 한숨을 쉬게 된다.     


  아마도 애초 ’브레이크 타임‘이 ’3시부터 5시까지‘로 정해진 것은 꽤나 그럴싸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손님은 점심 식사를 끝내고 3시부터 다시 일터로 복귀한다. 브레이크 타임에는 직원들도 식사를 하고 저녁 장사를 위한 재료를 다듬고, 망중한의 달콤한 시간을 보내며 전열을 정비한다. 그리고 5시부터 손님들의 수는 서서히 늘어나서, 7시 무렵에는 피크에 도달한다. 그렇지만 모든 식당이 ’브레이크 타임 제도’를 택하게 된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손님들은 식사 시간에 대한 변변한 선택지 하나 갖지 못한다. 이런 상황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도 약간 뒤틀린 상태라고 생각한다. 마치 처음에는 간편하게 불을 지르고 농사를 짓는 화전민이, 그 수가 늘어나면 산 전체가 황폐해 지는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브레이크 타임 브레이킹’ 아이디어는 평화로운 요식업계에 불을 지피는 일대 파란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몇 군데에서 이런 식당이 생기면, 다른 식당들도 슬슬 차별을 두기 위해서 영업 시간대를 옮기거나 브레이크 타임 시간을 변경할 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에 자주 가게 된 식당이 있다. 부타동을 파는 곳인데 정말 놀랄 만큼 맛있다. 초로의 부부 둘이서 여유롭게 운영하는 식당인데, 그 맛에는 여유로울 새가 없다. 판매하는 메뉴도 딱 두 가지 뿐이다. 부타동 혹은 부타동 곱배기. 주문과 동시에 북해도에서 직접 장인(장인 어른은 아니겠죠?)에게 배워온 비법 소스를 발라가며, 돼지고기를 즉석에서 숯불에 굽는다. 나는 우연히 북해도에 갔다가 실제로 부타동을 먹은 적이 있는데, 솔직히 이곳이 몇 배는 맛있다. ‘부타동이 생각나면 가는 식당’ 정도가 아니라, 가만히 있다가도 ‘부타동이 생각나게 하는 식당’ 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직장에서 식사가 안나오는 날이라 나는 전날부터 부타동을 먹을 계획을 세웠다. 반차를 내고 후다닥 서두르면 적당히 배고픈 상태로 부타동을 먹을 수 있겠군. 이런 설레는 생각을 하면서 우울한 금요일 오전을 버틸 수 있었다. 사소한 문제가 생겨서 예정보다 퇴근이 늦었지만, 서둘러 나와서 부타동을 먹으러 왔다. 그리고 식당에 들어선 시간은 2시 40분. 이곳에 자주 왔었지만 브레이크 타임이 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부타동을 주문하자 서빙 사장님(아내 쪽)은 약간 당황하며 살짝 굳더니, 이내 표정을 풀고 마실 물을 내왔다. 그리고 주방에 들어가서 요리 사장님(남편 쪽)과 쑥덕쑥덕무언가를 상의하더니 문 앞에 ‘오픈’ 팻말을 반바퀴 돌려서 ‘클로즈’로 바꿨다. 그러니까 나는 브레이크 타임 이전 마지막 손님인 것이다. 그때부터 슬쩍 눈치가 보였다.     


  어느 곳이든 영업장의 마지막 손님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주눅이 드는 법이다. 정당한 시간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다 해도 불청객이라는 찜찜함을 지울 수 없다. 식사를 기다리면서 가져간 책을 읽어봐도 어쩐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문득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드니, 나를 죽 쳐다보고 있는 서빙 사장님의 시선이 느껴진다. 어쩐지 나무라는 듯한 눈빛처럼 느껴지는 것은 단지 나의 착각인 것일까. ‘이제는 좀 쉬고 싶은데 조금만 빨리 오지. 저 더벅머리 자식은 얼마나 게을러 터졌길래 3시가 다돼서야 점심을 먹으러 오는거야’ 라고 생각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드디어 애태워 기다리던 덮밥이 나왔지만 식사를 하면서도 괜히 3시를 넘길까봐 서두르게 된다. 천천히 맛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나는 원래 덮밥이란 응당 젓가락으로만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인데, 자존심을 내려 놓고, 숫가락을 들고 퍽퍽 주먹질하듯 퍼먹었다. 그때문에 실수로 와사비도 한가득 먹어 버렸다. 그때 내가 흘렸던 눈믈은 매운맛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서러움 때문이었을까. 훌쩍. 결국 나는 나보다 먼저 들어온 여자 손님보다도 빨리 먹어 치우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물론 부타동은 그렇게 먹어도 맛있었지만. 역시 조금 아쉽다. 훌쩍. 4시에 부타동이 먹고 싶어지면 어디로 가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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