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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Aug 04. 2023

이름의 무게

플라뇌르

이름의 무게     


  류이치 사카모토가 지난주에 세상을 등졌다. 그는 52년 1월 생이니, 71세를 일기로 공식 발표에 따르면 직장암으로 인한 쇠약이 주된 원인이라고 한다. 온갖 암의 전이(편도선에서 림프절까지)가 오랜 시간 고인을 괴롭힌 사실은 무척 잘 알려져 있었다. 그의 건강 상태에 대한 걱정의 소식이 근자에도 많이 나오고 있어서 그랬을까. 항간에서는 올게 왔구나. 하는 심정인 사람도 많은 것 같다. 물론 ‘올게 왔다고’ 해서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이나 충격의 반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뉴스로 부고를 접하고 나는, 많은 이들처럼, 아침부터 조심스레 그의 음악을 틀어놓고 찬찬히 감상해 보았다. 그의 음악은 그렇게 트는 것조차 왠지 ‘조심’스럽다. 듣고 있을 때면 그가 어루만지고자 하는 정서의 형상이 여실히 떠오른다. 대체로 단조로운 음의 반복으로 시작되는 그의 음악들은, 하나하나가 의도를 그 도입부터 명확히 드러낸다. 마치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던 신체의 숨겨진 통점을 누르는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도 몰랐던 과거의 깊은 상처들을 위로 받는 이상야릇한 심정으로 자연스레 빠져들게 된다.     


  역시나 솔직히 말하자면 내 취향의 음악은 아니다. 하루종일 틀어놓고 주구장창 듣기에는 아무래도 피곤한 면이 있다. 감정선이 너무 가녀리고 섬세하게 질척해서, 감정이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수많은 점의 집적으로만 느껴진다. 복합적인 감정을 관찰할 수 있는 그만의 특수한 현미경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평소의 나는 아무래도 더 활기차고 태평한 비틀즈 풍의 노래들을 좋아한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말년을 담은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 코다’를 보고 있으면, 그의 음악이 그를 너무나 닮아있다는 것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혹은 그 자신이 스스로의 음악을 따라 살아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상을 보면서 나는 어쩐지 어디선가 이 장면들을 본 것 같다는 기묘한 기시감을 자주 느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의 삶 자체가 그의 음악과 너무 닮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역시 그것은 지극히 ‘류이치 사카모토’스러운 무언가다. ’류이치'라고 이름만 떼어 부르는 것도 어색하고, ’사카모토‘씨 라고 성만 부르는 것도 아무래도 꺼림칙하다. 어쩐지 세상에는 오로지 풀네임으로만 불러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름에 대해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어쩐지 나는 일본 여성의 풀네임을 들으면 AV배우의 이름처럼 듣게 된다. 성이나 이름만 따로 떼어 놓고 부르면 그럴 일이 전혀 없는데, ‘전체 이름’만 듣게 되면 이상하게 그런 느낌을 받곤 한다. 예컨대 ‘사나, 유나, 나오미'처럼 흔한 일본 이름들을 들으면 거기에 별다른 의견이나 편견 같은 것을 갖지는 않지만, 미나토자기 사나(트와이스) 라든가 오사카 나오미(테니스 선수), 오구라 유나(이 사람은 진짜 AV배우)라는 이름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어쩐지 AV배우 이름 같은걸’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으음, 역시 일본 여성들이 들으면 무척 기분 나빠 하려나.      


  말하기 시작한 김에. 나는 우리나라의 특정 ’이름‘에도 소소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도 예를 들어 보면, ‘백호’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절대 160센티미터의 비실비실한 남자일리가 없다. 라는 것이 나의 주장. 어쩐지 이름부터 호쾌한 남성성이 느껴진다. ‘태풍’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로 무척 마초적인 인상이지만 백호와는 다르게 진중한 남성성. 그리고 왠지 유머감각이 별로일 것 같다. ‘지민’이라는 이름의 여자애는 내편으로 두면 든든하지만 상대편이면 다소 곤란할 것만 같은 이름. ‘시아’라는 이름은 가녀린 태에 피부가 창백한 이지적인 미녀가 떠오른다.      


  이런 ‘이름에 대한 이미지’는 아마도 그저 한낱 편견일 뿐이다. 내 주장을 반박하는 사례는 누구나 당장이라도 얼마든지 들 수 있다. 그렇지만 어떤 경향성이랄까 특정한 분위기가 명확하게 느껴지는 이름들이 존재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그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름과의 관계가 긴밀하고 찰떡같이 어울린다. 사람들은 구태여 철학원이나 작명소에 가서 거금을 주고 이름을 받아 온다. 내 주변에도 성인이 되어서 이름을 개명한 친구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바꾼 쪽의 이름이 ‘월등히’ 좋다. 마치 자신에게 맞춰 제작된 옷을 새로이 꺼내 입은 사람처럼,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그 새로운 이름은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존재에 녹아든다. 이름도 이름의 주인도 전에는 없던 은근한 안정감이 느껴진다. 이런 경우는 그들의 삶이 이름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 것일까, 아니면 마치 사주팔자를 타고나는 것처럼, 한 사람은 태생과 동시에 운명에 합당한 이름을 ‘어떤 방식을 통해서든’ 부여받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성명학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지금껏 꽤나 과소평가 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이름’이라는 것은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유전자’처럼, 탄생과 같이 내려 받아서 인간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에 먼저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어떤 이름을 갖느냐, 그리고 어떤 이름으로 불리우느냐 하는 것은 유년 시절의 환경이 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유년 시절의 환경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리의 잠재 의식에 스며든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데로 흘러 사라지지 않고 단단하게 뭉쳐서 자아와 무의식을 구성한다. 그렇게, 이름이란 지금껏 나의 존재 그 자체 였을지도 모른다. 내 이름이 ‘유재석’이나 ‘정우성’ 이었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이름의 무게’ 라는 말처럼 이름이라는 것에는 정말 그에 걸맞는 무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것. 생전에 류이치 사카모토는 죽은 자들의 이름이 지닌 무게를 끝없이 다루어 왔다. 쓰나미가 지나갔던 후쿠시마의 원전 재해 지역에 찾아가, 보호복을 입고 해변을 걷는다. 황폐한 소나무 군락을 거닌다. 그리고 그곳의 소리를 녹음한다. 폐허에 남겨진 피아노로 망자의 울음 같은 장송곡을 쓴다. 동일본 대지진의 추모식에 가서 ’부디 편하게 들어달라‘며 직접 피아노를 연주한다. 태곳적의 소리를 찾아 남극까지 가서 빙하의 흐름을 담아오고, 아프리카 오지의 순수하고 근원적인 리듬을 탐닉한다. 그가 작업실에서 녹음을 하는 모습은, 뭐랄까, 자신의 삶의 장면에 깔리는 테마곡을 직접 연주하고 있는 착각을 하게 한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언제나 일종의 영원성을 추구해 왔음을, 그의 말을 빌리자면 ‘지속되는, 사라지거나 약해지지도 않는 소리를 내내 동경해 왔다‘라고 말한다. 영원해지기 위해서 사람들은 음악을 남기고, 소설을 남기고, 그림이나 영화를 남긴다. 그러니까 결국 이름을 남긴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다른 이름이 아니라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것이 나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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