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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Aug 07. 2023

훌렁 훌렁

플라뇌르

훌렁 훌렁          


  예전에 속옷 매장을 지나가다가, 토르소 마네킨이 브래지어만 차고 복도에 죽 늘어선 광경을 보게 됐다. 복도 양편에 하얀 몸뚱어리들이 일렬로 마주 보고 있고, 거기에는 각자 각양각색의 브래지어가 채워져 있다. 실내 상가의 마네킨들은 어딘가 스산한 기운을 지니고 있다. 그런 살풍경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막연히 그런 생각을 들었다. 어딘가 ‘브래지어 끈 빨리 풀기 대회’ 같은 것이 있으면 무척 재밌지 않을까. 나의 계획이란 이렇다. 대회가 열리는 시기와 장소는 8월의 여름 휴가철, 양양 해변이다. 거기에서 이 ‘브래지어 끈 빨리 풀기 대회’란 개최되는 것이다.     


  우선 참가자와 지원자를 받는다. 권위나 인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별 신통찮은 대회기 때문에, 당일 현장에서 즉석 참가 신청도 모두 받아준다. 여기서 참가자란 ‘끈을 푸는 사람’이고 지원자는 ‘끈이 풀리는 사람’이다. 마치 어린 시절 운동회의 미션 달리기처럼 해변의 양쪽에는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속옷을 입은 여성들이 줄지어 서있다. 그리고 준비~땅. 하면 최대한 빠른 시간에 모든 속옷을 해체하는 사람이 승리자인 매우 단순한 컨테스트다. 만약 사회적으로 물의가 된다면 남성이 지원자(풀리는 쪽)가 되고 여성이 참가자(푸는 쪽)가 되는 것도 괜찮을 지도 모른다. 평소 끈이 풀리기만 했던 쪽은 반대로 끈을 풀어보면서 ‘아, 남의 브래지어 끈을 푸는 일이란 보기보다 쉽지 않구나’ 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남성 쪽에서도 ‘이렇게 불편한 것을 하루종일 차고 있어야 한다니, 역시 여자로 사는 것은 녹록치 않구나.’ 하고 다정한 배려심을 키우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우승자가 나오면 다같이 브라보!(썰렁) 하고 외치기도 하고 말이죠. 관심이 많아지면 전세계의 브래지어 회사들이 앞다퉈 후원이나 광고를 출자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대회가 있다면 과연 우승자는 남자일까 여자일까. 의외로 남자 쪽일지도 모르겠다.     


  남성들에게, 적어도 나에게, 여성의 속옷이 신비로운 이유는 그것이 남성의 속옷처럼 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남자인 입장에서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솔직히 남성용 속옷에는 재미있는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다. 생김새나 재질도 모두 비슷비슷 천편일률적이고, 오직 ‘얼마나 땀을 잘 흡수하고 배출하느냐’하는 기능적인 요소에만 초점이 맞추어 있다. 사이즈도 미디움이냐 라지냐 엑스라지냐 하는 식으로, 전혀 세심하지 않다. 디자인이라고 해도 삼각이냐 사각이냐, 드로즈냐 브리프냐 하는 기계적인 구분만 있을 뿐이다. 거기에 어떤 상상력이나 창의성이 개입될 여지는 그리 많지 않다. 미학적인 추구나 철학적인 고민도 없다. 그러니까 남성의 속옷은 엄밀히 말해서 패션의 영역에서 제외해야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서 여성의 속옷, 특히 브래지어란 존재는 꽤나 남다른 점이 있다. 소재나 장식적인면에서도 남성에 비해 월등히 우월하고 디자인에서도 무궁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연결 후크만 보더라도 우선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문제가 있다. 있다면 몇 개가 있는지, 앞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 옆에 있는지와 같은 여러가지 선택지가 있을 수도 있다. 기능적으로 봐도 단순히 체온을 유지하고 피부를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체형의 단점을 보정해준다던가 모양을 잡아주는 둥 다양한 역할도 겸한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다 보면 아마 끝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근사하고도 의문스러운 점인데, 왠지 모르게 여성의 속옷은 ‘보여질 것’을 상정해 두고 만들어진 분위기가 있다. 물론 그것은 당연히 보여져서는 안 되는 ‘속’에 입는 옷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으니까. 요컨대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여질지도 모를 상황‘을 대비 혹은 준비하는 섬세한 태도가 느껴진다. 나는 남자라서 잘 모르지만, 어쩌면 그런 것은 필연적으로, 여성들이 세상을 대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이 투영된 결과가 아닐까. 어쨌거나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것을 미리 조심하고 준비하고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남자들이란 ’속옷이랑 수영복이랑 생김새는 비슷한데 대충 입고 물에 들어가도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수준이다. 세심함이나 조심성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제가 그렇습니다. 하핫. 참고로 브래지어 후크를 개발한 사람은 바로 ’마크 트웨인‘이라고 한다. 허클베리핀의 모험을 쓴 그 ‘마크 트웨인’ 맞다. 어쩌다가 트웨인은 여성용 속옷의 후크 같은 것을 개발하게 됐을까. 이것도 무척 궁금한 일 중에 하나다. 게다가 평소 그가 지닌 고아하고 침중한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왠지 재밌게 느껴진다. 만약 살아 있었다면 후크를 개발한 사람으로서 ‘브래지어 빨리 풀기 대회’ 심사 위원을 부탁해 볼 수도 있었을텐데.     


  브래지어 이야기만 주구장창 하니까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지만, 조금만 더 해보자면, 나는 ‘스포츠 브라’라는 것에 좀처럼 익숙해질 수가 없다. 몇 년 전에 레깅스만 입고 외출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이러니저러니 말이 많았던 것처럼 나는 ‘스포츠 브라’만 입은 사람을 길에서 만나면 흠칫 놀라게 된다. ‘저 사람, 밖에 속옷만 입고 다녀’ ‘으응, 저건 스포츠 브라라고 하는 거야’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이해할 수가 없다. 어쨌든 그것은 ‘브라’, 즉 속옷이 아닌가. 스포츠가 붙는다고 마음껏 드러내도 된다는 것은 단순한 말장난처럼 느껴진다. 스포츠 브라나 비키니는 당당히 입고 다니면서, 속옷은 부끄럽다는 안일한 형식적 사고 방식에도 동의할 수 없다. 뭐, 다들 의견이 그렇다고 하니 ‘나만 또 별난거겠지’ 하고 넘어가고 있지만, 솔직히 한켠에서는 ‘그게 그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럴바에야 따로 신경 쓸 것도 없이 ‘스포츠형 속옷’을 평소에 입고 다니다가 날씨가 너무 덥거나 물에 들어갈 일이 있으면 남자들처럼 훌렁훌렁 벗어버리면 편할 거 같은데. 나는 입어본 적이 없으니 당최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결국엔 이것도 단지 익숙함의 문제 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바다에서 수영복만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마주치면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다. 그렇지만 곧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에 적응되면 나도 똑같이 흐물흐물해져서 대충 입(벗)고 다니게 된다. 한여름의 바닷가에는 하고 싶은 일은 뭐든 괜찮다는 관용적 기류가 물처럼 흐르고 있다. 매년 많은 사람들이 해변으로 떠나는 이유에는 그런 포용적이고 낙관적인 분위기가 주는 설렘도 큰 영향을 주지 않을까. 말이 나와서 말인데 ’대체 어디까지 수영복을 입고 돌아다녀도 되는가‘라는 것도 평소 궁금한 것 중 하나였다. 예전에는 나도 물에서 나오자마자 몸을 닦고 상의를 걸쳤는데, 나이가 들고는 제법 뻔뻔해져서 편의점도 그냥 가고 식당도 간다.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는 운전도 한다. 특히나 해변을 면한 호텔에 묵을 때면, 바다에 들어갔다가 대충 모래알만 훔쳐내고 수영복 차림으로 호텔에 들어가곤 한다. 그렇지만 분명 호텔 앞까지는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던 ‘훌훌 벗고 다니는 일’이 멀끔히 차려입은 호텔 직원을 만나면 어딘가 머쓱해 지는 것이다. 어쩐지 교양 없고 무례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 최악인 상황은 체크인 시간에 맞물려 들어가면 그렇게 멀끔히 차려입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뻔뻔한 나라도 그럴 때면 민망한 마음이 솟구쳐서 얼굴도 빨개지고 몸도 슬쩍 가리게 된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옷을 안 걸치고 다니고 있으니, 이렇다 저렇다 투덜댈 자격은 없지만.     


  항간에는 ‘브래지어 해방 운동’ 같은 것도 있다고 하던데,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역시 여성들을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째서 그런 것까지 일일이 논쟁거리가 되야하는 것일까. 속옷이란 누군가 입고 싶다면 입고 벗고 싶다면 벗으면 될 일이지, 남이 시시콜콜 참견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브래지어 해방 운동’이란 모든 여성들이 일률적으로 브래지어를 차지 말자고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사 차든 말든 신경꺼라’ 라며 소박한 자유를 요구하는 애잔한 투쟁인 것이다. 다만 속옷뿐만 아니라 상의까지 훌훌 벗어던지고, 도시의 행인들에게 괄괄 소리 지르는 행동은 조금 과격하고 부끄러운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든다. 그것보다는 개인적으로 해수욕장에서 태닝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슴을 가리지 않는 편이 더 온건하고 설득력 있는 방법이 아닌가 싶은데. 학창 시절 교과서에 실린 ‘육체미 소동’이라는 드라마 시나리오에서는 가슴 근육을 뽐내고 싶은 마음에 남자 학생이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브래지어 해방 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속터질 것이다. 역시 사람이란 그 입장이 직접 되어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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