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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Aug 07. 2023

두 축의 가위

플라뇌르

두 축의 가위          


  변변치 않은 꿈 이야기인데, 나는 가끔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푸르고 맑은 지중해의 바다 위를 굉장히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다. 높이는 거의 수면에 닿을락 말락. 기껏해야 30센티미터 떨어져 있을까. 나는 굉장히 막중한 임무를 지니고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절벽 위의 성으로 날아가는 중이다. 파라 세일링처럼 부웅 떠서 헤드윈드를 맞고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제트 스키처럼 공기를 시원하게 가르는 기분이 아주 그만이다. 그래서 언제고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임무 같은 건 나몰라라 내팽개치고 바다 위에서 유유자적 날아다니고만 싶다.     


  나는 프로이트의 책을 읽은 뒤로 꿈을 해석하는 버릇이 생겨서, 선명한 꿈을 꾼 날은 종일 머릿속에서 쳇바퀴를 굴린다. 프로이트 아저씨에 따르면 압축과 전위는 꿈을 만드는 두 명의 공장장이다. 사람은 꿈 속에서 어떤 특정한 잠재 욕망을 어딘가 왜곡된 방식으로 실현하고자 하는데, 그럴 때 욕망과 실현은 각각 '압축'되고 '전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꿈을 꾸고 나면 여기서 잠재된 욕망은 대체 무엇인지, 그 실현은 어떤 방식으로 왜곡되었는지 생각한다. 물론 대체로 별 소득은 없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바다 위를 나는 꿈을 꿨다면, 하루종일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무릎을 탁 치면서 '아하 어쩐지 바다에 있는 날 것이 먹고 싶었던 모양이군' 하고 회를 먹으러 가는 식이다. 상당히 편의적이고 편파적인 해석인데 이런 것도 나름 소소한 재미가 있다. 여자친구에게 먹고 싶은 저녁 메뉴를 은근슬쩍 유도할 수도 있다. '꿈을 해석했더니 오늘은 아무래도 내 잠재 욕망이 회가 먹고 싶나봐' 하고 유식한 척을 하면 된다. 사실 이래서야 침을 뱉어서 운세를 점치는 돌팔이 점술가와 다를바 없지만, 재미로 하는 건데 뭐 어때. 하는 입장이다.     


  어렸을 적에는 야한 꿈도 곧잘 꿨었는데 이상하게 요즘은 통 야한 꿈을 꾸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아쉬운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지만, 그저 궁금할 뿐이다. 왜 나는 더이상 야한 꿈을 꾸지 않을까. 내가 꾸는 야한 꿈은 패턴이 주로 일정한데, 일단 옷을 대충 입은 육감적인 여성이 둘 나온다. 각기 다른 매력이지만 너무 자세히 설명하면 이상해지니까. 아무튼 그 둘은 굉장히 나이브한 표정으로 내 침대로 스물스물 올라온다. 매번 다른 방이지만 언제나 침대는 굉장히 크다. 여기까지는 늘 같은 패턴이지만 그 이후로 진행되는 과정은 천차만별이다. 말할 수 없이 야한 짓을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나에게 이런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깨버리는 경우도 있다. 쩝. 그러면 혹시나 꿈이 이어지지 않을까 다시 잠을 청해보기도 했다. 물론 다 옛날 옛적 이야기다.     


  그런데 이 꿈의 이상한 점은 두 여성의 얼굴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평소 전혀 관심도 없었고 이성적인 감정을 조금도 가져 본 적 없는 여성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이런 꿈을 꾸고 나면 내심 걱정하곤 했다. 나에게는 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나의 깊은 속내는 그 여자애를 좋아하고 있던 걸까. 당시에 나는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조타에 서투른 초보 어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지금 와서 떠올려보니, 그것은 아마도 꿈이 선택한 합리적인 대안책은 아니었을까.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관심 있는 사람을, 나의 이상하고 음침한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렇게 꿈으로 불러내 이용하는 것에 아마도 거부감을 느낀 깊은 곳에 존재하는 그 무언가가, 차라리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을 불러내 충족하는 방식으로 대체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니 당시에 꿈 속에 나온 이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렇지만 꽤나 그럴싸한 추측이 아닌가. 역시 꿈이란 왜곡된 욕망 성취 방법인 것이구나. 다시 한번 프로이트의 통찰에 실로 감탄하게 된다.      


  전에는 한 번 고양이 학예외의 학부모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아, 물론 꿈속 이야기다. 스탕달 소설에 나올 법한 중세 성에서 열린 학예회다. 고성의 육중한 나무 현관을 열고 들어가면 다종의 깜찍한 고양이들이 단상 위에 위풍 당당하게 앉아있다. 굉장히 훈련이 잘된 늠름한 고양이들이다. 격식을 차린 옷을 입고 칠판 앞에 선 고양이들의 선생님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학예회를 시작한다. 물론 나는 그것이 꿈속인 줄은, 꿈에도 모른다. 나는 고양이의 학부모고 고양이들은 준비된 재롱을 뽐내며 학예회를 진행한다. 그리고 그것이 굉장히 당연한 일로 느껴진다. 어쨌거나 그것에는 정식으로 치뤄지는 행사의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있다. 나의 귀여운 딸 고양이는 새초롬한 샴 고양이로 목에 붉은 리본을 두르고 있다. 그 작은 교실은 무척 따뜻하고 안전하다.     

  그러다 한 순간의 장면 전환- 따스한 암시를 두른 빛은 순간 적나라한 주광등 빛을 띠게 된다. 시체 안치실의 싸늘한 공기가 느껴지고 다른 사람들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 사라진다. 비현실적인 학생 고양이들은 순식간에 현실의 고양이가 되어 딱딱한 얼음 바닥으로 넘어진다. 팅팅 소리가 날 정도로 꽝꽝 얼어버렸다. 나는 샴 고양이에게 다가가서 살핀다. 고양이의 입에서는 허연 입김이 덜덜 떨리듯 새어 나온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딸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고양이임을 절절하게 인식하고 만다. 고양이는 결국 고양이인 것이다. 꿈 속에서도 그것의 엄청난 낙차는 절절하게 느껴진다. 리본이 있던 자리는 어디서 묻은지 모를 피로 엉겨져 있다. 그것은 어쩌면 고양이의 피일까. 혹은 나의 손에서 베어 나온 것인 지도 모른다.     


  꿈에서 깨고 나서도 그 무참한 기분은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이상하게도 꿈에서 느낀 감정은 그 어떤 현실보다 처참한 것이었다. 눈을 감고 잠시만 상상하면 달달 떨리는 고양이의 몸과 두 손에 올려놓고 살피던 털의 감촉을 선연히 느낄 수 있다. 가혹하게 리얼한 꿈이다. 꿈의 역할은 물론 직접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니다. 꿈의 역할은 자신도 모를 만큼 깊은 곳에 숨겨진 연약한 소망이 입은 상처를 끄집어낸다. 더 정확하게는 끔찍한 상처의 존재를 또 다른 형태로 적나라이 드러낸다. 그럴 때 우리는 더이상 숨을 곳이 없다. 꿈은 몰래 숨겨둔 어린 시절 타임 캡슐을 파헤치고, 그 소망들이 모두 헛된 것이였음을 눈앞에 들이민다. 그리곤 가위로 조각조각 잘라버린다. 전위와 압축이라는 두 축의 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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