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말 Aug 08. 2023

소식의 모습

플라뇌르

소식의 모습

     

  좋은 소식 한 가지와 나쁜 소식 한 가지가 있다. 어떤 소식부터 들을 것인가. 은근히 까다로운 난제다. 평소 나는 이런 상황에 놓이면 대개 좋은 소식부터 듣곤 한다. 먼저 좋은 소식을 듣고 그 뒤에 찾아올 불길함의 크기를 가늠해보는 것이다. 기쁜 일이 별거 아니라면 나쁜 일도 별 거 아니겠구나 싶고, 좋은 일이 크다면 마음속으로 '이 기쁨으로 어떻게든 버텨 봐야겠다' 하고 주먹을 꽉 쥐고 나쁜 소식에 대비할 수 있다. 권투 경기에서도 맞을 것을 예측만 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기절하는 상황은 면할 수 있다고 했다. 펀치가 사각에서 날아 온 경우에는 자칫 다운 당할 위험이 있다. 물론 타이슨 급 나쁜 소식에는 그것도 별 효과가 없겠지만.     


  최근에 유튜브를 보다가 이런 고정 관념을 펀치볼처럼 흔드는 영상을 하나 봤다. 스탠드업 영상으로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중 무엇을 먼저 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는 무조건 나쁜 소식부터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유는 이렇다. 이 사람이 통풍에 걸려서 의사에게 갔다. 진찰을 받고 나서 피해야 할 음식을 알려주는데, '브로콜리와 시금치는 피하세요. 통풍에 안 좋아요' 그는 듣던 중 참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들은 아프기 전에도 먹지 않던 아무래도 좋은 것들이다. '뭘 더 안 먹어야 하나요?' 의사는 이어서 말하기를 '맥주와 소고기 그리고 막창, 대창, 곱창, 해산물은 먹지 마세요' 젠장, 대체 왜 브로콜리랑 시금치부터 말해요. 순서를 바꿔 말하면 그나마 조금 기분이 낫다고 한다. 흠, 과연 그럴까. 예를 들어 어떤 여자가 '오늘 오빠랑 자고 싶어요'라고 말하고는 이어서 '근데 사실 저 트렌스젠더에요' 라고 하면 기분이 별로지만 '저 사실 트렌스젠더에요' 라고 한 뒤에 '그런데 오늘 오빠랑 자고 싶어요' 라고 하면 기분이 가히 나쁘지는 않다고 주장하는데. 흐음. 어쩐지 합리적인 의견처럼 들린다. 언제나 나쁜 소식 같은 건 슬쩍 건너뛰는 것이 상책이다.     


  나는 전부터 개인적으로 인류의 전쟁사가 야기했던 집단적 학살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전쟁 그 자체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전쟁 후에 이뤄진 학술적 연구도 크게 관심 없다. 이른바 '수용소 문학'이라고 불리는 기록. 참혹한 산지옥에서 살아 돌아와 증언처럼 남은 문학을 좋아한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같은 책이나 굴라크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솔제니친의 이른바 '고발 문학'들을 읽고 있을 때면 나는 실제로 목이 타거나 가슴이 저릿하게 아려온다. 때론 그것이 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예언처럼 읽힌다.      


  만약 그런 문학이 실제적이라면 그것은 중대한 의미를 지닌 객관적 자료가 되고, 비유적이라면 그 나름도 통렬한 메타포로서의 가치를 확고하게 지닌다. 전에도 쓴 말이지만 전쟁은 예술가들에게 언제나 창작의 비옥한 토양이다. 송구한 말이지만 전쟁이란 언제나 끝나기 마련이니까. 헤밍웨이는 괜히 할 일이 없어서 슬렁슬렁 각종 전쟁을 찾아다니며 작품을 탈고해 낸 것이 아니다. 헤밍웨이의 문장은 언제나 총알처럼 난데없이 날아와 파고드는 통절한 통찰이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정말 종잇장의 두께로 육박해 올 때만이 깨닫게 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좋은 소식일까 나쁜 소식일까.     


  '좋은 소식을 먼저 듣는가 나쁜 소식을 먼저 듣는가'하는 논쟁이 생기는 이유는 세상에 너무나 많은 '나쁜 소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밝은 소식을 들려주는 귀여운 파랑새가 언제나 찾아 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트위터가 그 상징을 모조리 오염시켜 버렸는지도 모른다. 결국 이런 의문이 하나 남았다. 그렇다면 '나쁜 소식'은 직설적으로 덤덤하게 전달해야 하는가 돌려 돌려서 우의적으로 전달하여야 하는가.      


  장 아이리스의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는 그야말로 우울한 사건을 직설적인 방식과 평명한 어조로 전달하는 책이다. 사망 소식을 전달하는 저승사자처럼 무표정한 전령은 끔찍한 소식을 가져온다. 작가는 자신의 조부모가 겪었던 '난징 대학살'의 이야기를 조사하고 알리는데 온 생애를 미련없이 바친다. 그녀의 책에는 수없는 남녀노소 난징인의 시신과 마치 짚새기에 이어진 곶감처럼 뎅그머니 놓인 머리들 사진을 볼 수 있다. 무더기무더기로 쌓인 난징 주민의 머리를 보고 있으면, 어떤 기묘하고 뒤틀린 취향의 현대 미술가가 만든 하나의 조형 작품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작가는 실로 방대한 양의 자료를 선별하고 다분히 객관적인 방식을 채택하여 그 내용을 전달했다. 사건을 연대순으로 나누고 참혹한 참상을 글로 묘사하기보다는 사진 자료를 통해 무감한듯 제시한다. 그렇지만 책과 다르게 작가 개인의 삶은 역동과 요동치는 소용돌이 속이었나 보다. 실제로 저자는 이 책을 쓴 뒤에, 이름 모를 악령에 씐 것처럼 권총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마치 난징에서 무참히 죽어간 사람들의 뒤를 따르듯이.     

반대로 나쁜 소식을 우의적인 형식으로 들려주는 책도 있다. 아트 슈피겔만이 쓴 'MAUS(쥐)'는 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우화 만화다. 조금 폭력적인 말인지도 모르지만, 아우슈비츠의 참혹한 이야기에는 우리 모두 어느정도 익숙해져 버렸다. 미디어에서 그리고 역사서와 문학에서 이미 충분히 많이 소비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접할 때마다 새로운 시사점을 주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잔혹한 제노 사이드가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는 더이상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인류는 가스실이나 무차별 살육이나 가혹한 노동의 이미지에 익숙해졌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했다면, 양차 세계대전의 전후 문학은 인간성의 죽음을 선언한지 오래다.     


  그렇지만 이렇게 우화로 창작된 수용소 이야기를 만화로 읽고 있으면 새삼스레 그것은 전혀 새로운 사건처럼 다가온다. 인간성이 없는 곳에는 동물들이 남았다. 직접적인 기록의 형식이 문을 두드리고 택배를 두고가는 우편 집배원과 같다면 메타포의 과정을 몇 차례 거친 우화는 불온한 암시를 품고 있는 먼 태풍의 흔적처럼 느껴진다. 끔찍한 내용에 상반되는 카툰의 형식은 외려 사건의 깊숙한 심연으로 천천히 차례차례 접근해 들어가게 한다. 어쩌면 이 세상에는 세심하고 정확한 여러개의 비유를 통해서만 도달 할 수 있는 본질이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시공간의 휘어짐을 통해서만 그 존재를 추측할 수 있는 검은 행성처럼.


  아이리스와 달리 슈피겔만 할아버지는 아직도 정정하게 살아있다. 그것은 내용을 담는 작품의 형태 와도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나쁜 소식을 전하는 직접적인 방법. 반대로 메타포적인 우회법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건 그것이 결국 '나쁜 소식'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컵이 아무리 깨끗하다 할지라도 그 안에 든 것이 오물이라면 별 소용이 없는 것처럼. 그렇지만 이런 유의 작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물을 담기 위한 그릇을, 그것이 치명적인 독극물이기에 더욱 더 아름답고 근사하게 그릇을 제작하는데 인생의 대부분을 바쳐왔다. 나쁜 소식을 전달하기 위한 문학을 평생동안 만드는 사람은 어떤 심정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분명 특수한 종류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여기 나쁜 소식이 하나 있다. 슬프게도 여러가지 모습으로.

작가의 이전글 글씨방 일곱 동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