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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Aug 12. 2023

사인을 받는 일도

바도

사인을 받는 일도     


  어린 시절부터 나는 줄곧 ‘유명인의 사인을 받는 일이란 시시하다’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단지 종이에 적힌 누군가의 이름일 뿐이지 않은가. 종이는 찢어지거나 젖어버리기도 쉽고. 지금 생각하면 꽤나 반사회적인 어린이였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지금도 의견은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아마도 사람의 특정한 성향은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든다고 할지라도 크게 바뀌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나는 지금도 종이에 사인을 받는 것은 무척 시시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눈으로 관찰하거나 사진을 찍는 것이, 가능하다면 대화를 나누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지 못하니까 사인을 받는 거라고 한다면 뭐 할말은 없지만.     


  그런 나도, 솔직히 말하자면, 종이에 유명인의 사인을 받은 적이 있다. ‘시시하다면서 이 바보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내 나름대로의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다. 풋풋한 대학생 시절의 이야기다.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던 나는 치아 교정을 위해서 버스를 타고 격주로 서울에 올라와야만 했다. 그런 고로 나는 자연스럽게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 대해서는 빠삭해져서 시간이 남으면 음식점도 가보고 슬렁슬렁 백화점도 구경하곤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살 물건이 없어도 백화점을 돌아다니는 것을 꽤 좋아했다. 그것 또한 쉽게 바뀌지 않는 것 중에 하나다. 당시에 나는 매번 백화점 내에 위치한 스타벅스에 들러서 음료를 하나씩 마셨다. 그날도 당연히 스타벅스로 갔는데, 웬일인지 주문 대기 줄이 인기 놀이기구 마냥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다. 무슨 커피 한 잔 마시려고 줄까지들 서는 거야. 속으로 투털투덜 대며 조용히 뒤에 줄을 섰다. 그런데 내가 줄을 서자 마이크를 든 깔끔한 검정 수트 차림의 아저씨가 내 뒤로 오더니 ‘마감 하겠습니다’ 하는 것이다. 통제 선을 세우고 새치기 감시까지 한다. 조금 이상했지만 나는 ‘우와, 서울 백화점은 스타벅스 줄도 관리하는구나’하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풋풋한 시절이다.     


  나는 문고본을 꺼내 읽으며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무언가 웅성대는 낌새를 느낀 나는 앞에 서 있는 동년배의 남자들에게 물어봤다. 혹시 이거 무슨 줄인가요. 이런. 그들은 모두 같은 팬클럽으로서 배우 이민정을 보려고 기다리는 중이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서있는 위치는, 저 멀리 이민정씨가 앉아 있는 커다란 테이블로부터, 스타벅스의 입구를 지나, 기둥 두개를 끼고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그것이 스타벅스 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맹세컨대 나는 종이에 유명인의 사인같은 건 시시해서 받고 싶지 않다. 그것이 이민정이건 이병헌이건 톰 행크스건 멧 데이먼이건 똑같다. 그렇지만 사태가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어쩐지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행사 진행자도, 팬들도, 보디가드 아저씨들도 무척 진지한 표정이다. 사인을 받지 못한 안타까움에 자리를 뜨지 못하는 팬들도 있었다. 그런 진지한 사람들 앞에서 손을 들고, 스타벅스에 가야겠으니 통제선 아래로 나가겠다고 말할 용기가 도저히 생기지 않았다. 내가 나가버리면 한 명을 더 뽑겠다고 난리가 났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인회는 그렇게 마무리되고 이민정씨는 남은 용지 한 장을 바라보며 꺼림칙한 심정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꾹 참고 장장 30분을 기다렸다. 이민정씨는 마지막 사람인 나를 보고 반가운 친구처럼 더없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뭐라고 적어드릴까요? 알아서 적어주세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실로 최악의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마지막으로 선택된 행운의 팬으로서 의당 했어야 할 대답이 있었을 것이다. 팬이에요. 아름다우세요. 좋아해요. 사인 받으려 지방에서 일부러 올라왔어요. 등등. 솔직히 무슨 말을 했든 ‘알아서 적어주세요’ 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오직 음료를 빨리 마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죄송.     


  서울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종종 유명인을 마주친다. 누가 봐도 유명인처럼 다니는 사람도 있고 도무지 유명인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작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주변을 두리번 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 바닥이나 목적지에만 초점을 두거나 아무런 초점 없이 멍하니 걷는다. 그들은 아무래도 바라보는 것보다는 바라봐지는 것에 더 익숙한 유명인인 것이다. 누군가 일상적으로 그들을 발견하고 아는 체를 하고 말을 걸어온다. 그들이 길에서 먼저 말을 걸거나 쳐다보는 일은, 아마도, 거의 없다. 때로 나는 그들이 사진을 찍어주고 사인을 해주고 있는 것을 본다. 셔츠나 모자에 해줄 때는 그나마 사정이 낫다. 사람들은 과제 하던 메모지나 카페의 티슈에도 사인을 받으려 한다. 유명인을 만나 허겁지겁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은 뒤 스치듯 떠나간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그렇게 배우 이민정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인을 받은 인물이 됐다. 그 종이는 지금 어디 있을까. 전혀 기억해 낼 수가 없다. 그렇지만 나는 적어도 이민정씨의 그 아름답고 밝은 미소는 무척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8년이나 지난 지금도 무척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미소는 뭐랄까 ‘웃음의 완성’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당시의 이민정씨는 이런저런 일로 무척 심하게 마음 고생을 하던 때다. 매스컴에서도 매일 집까지 찾아가서 들쑤셔댔다. 그러니 아마도 사인회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힘들어서 웃고 싶지 않고 사인하고 싶지 않아도 끝까지 프로페셔널한 친절함을 유지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그렇게나 멋진 미소를 꺼낼 수 있다니. 진심으로 멋지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그날 그 미소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엄청난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사인을 받는 일도 조금은 덜 시시하게 느껴진다. 이민정씨는 사인 밑에 조그만 글씨로 ’언제나 행복하세요!'라고 적었다. 이민정씨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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