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 모

‘좋은 엄마‘ 되기

by grassrain

나의 엄마는 요즘 유행하는 단어로 표현하면 테토녀다. 목소리가 크고 주체적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배우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제일 중요시 여긴다. 전업 주부임에도 항상 바깥에서 할 일이 많고, 헌신적인 어머니상을 꿈꾸면서 가족들을 진두지휘하고 싶어 한다. 주목받는 걸 좋아하고 보이는 걸 중요시 여긴다. 독실한 천주교지만, 마음에 드는 대통령은 하늘님이라 부른다. 전기밥솥의 새 밥에 밥주걱으로 십자가를 한 번 그리며 성호를 긋고 밥을 퍼내라 한다. 돈과 물건에 대한 욕심이 많고, 에너지가 많으며 열정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하는 말이 무조건 정답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집착하는 엄마와 덜 떨어진 나의 모습에는 외면하는 엄마를 봤다. 양극을 오가며 정신 차릴 수 없는 상황에서 엄마를 맞춰주는 삶은 어린 나에겐 버거웠다. 나 자신을 질책하기만 했고, 다른 이들에게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칭찬받고 싶은 적 없었다. 비난만 받지 않으면 됐다. 위로받고 싶은 적도 없었다. 불안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아무 일 없기만을 바랬다. 뽐낼 게 많았던 여동생과 나란히였으니 잔뜩 쪼그라들 수밖에 없는 아이였다. 마이너스 자존감의 존재였다.

부모님 앞에서 큰 소리 내거나 다리를 펴고 앉는 건 절대 하면 안 되는 큰 일인 줄 알고 컸다. 민주주의는 하나도 없는 가정의 형태였다. 첫째였던 난 엄마의 감정쓰레기통이 되어 드려야 했고, 엄마의 답에 맞는 사람이어야 했다. 화초 같은 아이여야 했다. 유년시절의 난 생각과 행동이 모두 묶인 채, 우울과 무기력만이 가득한 날들을 보냈다. 탈출구도 보이지 않았고, 없어지는 게 정답이라는 결론만 지어냈다.


엄마가 된 나에게 애들을 너무 유별나게 사랑한다고, 너무 지나치다고 친정엄마는 한 소리한다.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지나치다는 게 있을 수 있나? 내가 이 세상에 내어놓았기에 엄마로서 아이를 도맡아야 한다 생각했다. 특히 어린아이일수록 손을 많이 필요로 하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육아가 적성에 맞지 않았기에 천 기저귀를 사용한 적도 없고, 유기농이나 올가닉등을 따져가며 아기 물품을 사지도 않았다. 아기옷을 어른옷과 함께 기존 세제로 한 세탁기에 빨아냈고, 청소는 위험한 요소들을 치워주는 정도였다. 아이들 교육에도 크게 관심 없던 나였는데… 도대체 나의 어떤 부분이 유별스럽다는 건지 참 궁금했다.

그러다 아기에게 그 나잇대가 온 것이었다.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표현하는 시기가 도래하자 알게 됐다. 바닥에 드러누워 우렁차게 목청을 뽐내는 첫째를 겪으면서였다. 몇 번을 겪어봤지만 어쩔 줄 몰라하며 쩔쩔매는 나에게 오랜만에 만난 친정엄마는 “저런 애는 날을 한번 잡고 애 기를 한번 확 죽여야 해”라고 속삭인다. 덧붙여 “너네는 저러지 않았어. 쟤는 누구 닮아서 저러는 거라니? 네 신랑도 안 그랬을 거 같은데…”라는 말을 남기며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엄마는 또 말씀하신다. “애들 더 키워봐. 언젠간 날 이해할 거야. 내가 너희를 얼마나 힘들게 곱게 곱게 키웠는데.”

엄마가 곱게 키웠다고 말하는 부분들은 원피스의 밑단과 소매를 늘리고 줄여 입혔다는 거, 머리를 아침마다 정성스럽게 묶어주었다는 거… 나는 치마 입는 걸 좋아하지도 않았고, 양갈래로 묶은 머리를 풀어 하나로 묶고 등교하던 기억이 난다. 엄마의 인형이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엄마를 보며,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는 만화 주인공처럼 헤쳐 나가 보겠다고 다짐했다. ‘할 수 있다 ‘를 일기장 가득히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칭찬하고 위로하고 응원하며 좋은 어른이 되리라 되새겼고, 그러다 어느 날에는 이유 모를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밤마다 울다 잠들었다. 그리고 절대 죽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엄마는 분명 자식을 위하며 사셨을 거고, 엄마로서 줄 수 있는 사랑과 정성으로 키우셨을 거다.

동생은 결혼 후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를 나에게 귀띔해 준다. “난 언니처럼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없어. 일단 출퇴근하고 일하고 돈 버는 게 좋고, 그리고… 내가 엄마 같은 엄마가 될까 봐 무서워. 아이 못 낳겠어. 조카들만 이뻐해 줄래.” 때 마침 그만 두기 아까운 직장에 다니는 동생이 아기를 낳으면 주부인 언니가 당연히 봐줘야 한다고 친정부모님이 얘기하시던 때였다. 나는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엄마의 마음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거라고, 내가 철이 없는 거라고, 내가 원하는 어머니상 또한 나의 욕심일 뿐이라고 되새기며 살아왔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으니까.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엄마로서 최선의 선택을 하며, 엄마만의 방법으로 시간과 마음을 쏟으셨을 거다.

그리 믿어야 나의 마음에 평화가 오기에… 엄마를 엄마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나를 파먹고 살아냈다. 그 결과 성실하고 건강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믿어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이 곁에 없었지만 나는 잘 살아냈다. 시간은 흘러 흘러갔고, 그 속에서 꾸역꾸역 버텨냈다. 난 정신승리자다. 삶을 포기하려 했던 나에게 제일 필요한 건 ‘자존감’이라는 것도 일찌감치 알아냈고, 나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자부한다. 나 스스로를 잘 챙길 수 있다. 나에게 ‘이상적인 엄마’는 진작부터 필요 없었다. 그저 잠잘 곳이 있고, 배고프지 않게 컸으면 됐다. 결과가 좋진 않았지만, 최선의 교육을 받고 자랐으면 차고 넘친다.

헌데 내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엄마의 사랑”에 대한 배신감에 괴로웠다. 친정엄마와 똑같이 딸 둘을 낳고 키우고 있다. 아이를 낳으면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한데 지금까지도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곱씹어봐도 더더욱 삼킬 수 없다. 오히려 구역질 나게 화가 난다.

’아무리 마음의 여유가 없다 하더라도, 어린 자식한테 그럴 수 있었지? 도대체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 아이를 낳은 거지?‘

아이 엄마가 되어서도 친정엄마를 헤아려주지 못하고 밀쳐내기만 하는 나에게 엄마는 더 섭섭해하고 집착했다. 나이 사십이 훨씬 넘어도 여전히 사춘기다. 엄마에 대한 반감과 증오심만 타오른다.


이유 없는 불안감과 무기력함을 되짚어 보며, 아이들이 나의 유년시절처럼 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엄마인 내가 주는 상처는 최소한으로 하고 싶었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원했던 엄마가 되기로 다짐했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엄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타인은 물론 아이들에게도 사과할 줄아는 엄마, 변덕이 없고 또렷한 기준이 있는 엄마, 다정 다감한 엄마, 칭찬을 아낌없이 해주는 엄마, 동시에 두 명 다 칭찬하는 엄마, 기분이 안 좋을 때 곁에 있어주는 엄마, 아이와 관련된 모든 건 의논하고 아이의 의견을 적극 들어주는 엄마, 아이의 선택을 믿고 실패해도 멋지다고 말해 줄 수 있는 엄마, 혼낼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엄마, 자존감을 지켜주는 엄마, 아이가 이야기할 때 눈 마주치고 들어주는 엄마, 함께 있으면 편안한 엄마, 더 나아가 아이를 웃게 만드는 엄마.

하지만 아이들에게 진짜로 줄 사랑은 없었던 것 같다.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좋은 엄마 연기를 해온 거 같아 미안하다.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 두 딸이 해주는 말들로 이제야, 나름, 아주 조금은 괜찮은 엄마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해 보련다. “엄마는 재밌고, 너무 웃겨.” “엄마 너무 좋아.” “엄마는 쫌 많이 귀여워.” 토씨 하나 보태지 않고 그대로 아이들이 해주는 말이다. 그리고 뒤이어 고백하자면, 우울과 무기력에 허덕이는 나의 모습을 보며 자라 온 아이들은 ‘잠을 많이 자는 엄마’, ‘먹을 땐 너무 많이 먹는 엄마‘, ‘귀찮은 게 많은 엄마’ 라 표현한다. 그래도 이런 엄마라면 난 너무 만족한다. 뿌듯하고 행복하다.


엄마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아이들이 성장하며 나 또한 성장통을 겪은 시간들이었다. 앞으로 아이들과 더 많은 일이 있을 테다. 나 또한 더 많이 성장해야 할 필요도 있다. 친정엄마 말대로 아이들의 사춘기를 끝날 때까지, 성인이 될 때까지, 아니 아이들이 사십 대가 될 때까지. 나중에 나는 어떤 엄마로 내비쳐질지 두고 보겠다.

나는 ‘좋은 엄마’가 되어가며 친정엄마에겐 복수 중이다. 진정한 좋은 엄마가 되어 본때를 보여 줄 테다.

친정엄마는 요즘 사춘기인 애들이 유별나게 지 엄마만 좋아한다 말한다. 이 정도면 나의 복수가 잘 되고 있는 거 같지 않나?

난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될 거다.


**** 작가의 말 ****

‘엄마‘라는 주제로 나름 오랜 시간을 들여 쓰고 수정했다. 아마도 사춘기 시절부터 생각해 왔고 지쳐왔고 피하고 싶었던 주제였다.

엄마는 지금도 말씀하신다. “엄마가 있다는 존재만으로 큰 힘이 되지. ” “엄마 죽으면 알게 되겠지.” “부모가 죽고 나면 뭐 해, 살아있을 때 잘해야 하는 거야.”

엄마의 사랑에 비해 한없이 차갑고, 살갑지 못한 큰 딸에게 섭섭해하시는 말씀인 거 안다. 모른 척한다. 엄마가 아는 그 ‘눈치 없고 맹한 아이’가 되길 선택한다.

엄마가 원망스럽고 만나기 끔찍하게 싫었다. 사십이 넘어서도 엄마에 대한 감정이 철들지 못해 자책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엄마이듯, 엄마 마음에 들지 못한 딸이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꼭 가깝게 지내서 날 파먹을 필욘 없다 생각했다. 최소한으로 만나고, 최대한 웃으며 기분 좋게 헤어지는 거다. 그게 최선이다. 또 아침 일찍 엄마에게 전화 온다. 갑작스럽게 약속이 취소돼서 큰 딸과 점심 먹고 싶다는 엄마에게 바쁘다고 둘러대며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죄책감을 깨치려 생각한다. 엄마는 나와 밥을 먹고픈게 아니라 혼자 있는 시간을 끔찍이 싫어하는 것임을 왜 엄마는 모를까. 왜 저리도 외로워할까. 왜 누군가에게서 외로움을 채우려고 할까. 말로만 혼자 사는 인생이다, 집착하지 않고 모든 걸 내려놓겠다 하고… 관계중독인가?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주제 추천도 있었고, 엄마를 더 이해해 보기 위해 글을 쓰고자 결심했지만,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진다. 엄마를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오만한 생각이다. 그저 내 마음이 편해질 만큼만 엄마를 알고 싶다. 하지만 얼마 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유‘로 싸웠던 사건을 떠올리면… 나의 엄마라는 게 부끄러울 정도다.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지금처럼 적당히, 자식으로서의 의무는 하며, 엄마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내 삶을 살아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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