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내장! 너는 도대체 왜?!

눈과 코

by grassrain


그날은 바로 윗 층의 이삿날이었고, 한 여름이었다. 아침 일찍 큰 창을 활짝 열고 사다리를 따라 짐들이 오르내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바로 코 앞에서 펼쳐지는 흔치 않은 구경거리에 잠시 넋을 놓았다.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다. 내 몸엔 심상치 않은 자극이 되었고, 코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그리고 몇 번의 재채기와 함께 코에서 맑은 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폭포 쇼는 반나절이 지나도 멈출 기미가 없었고,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였다. 참다 참다 집 앞 약국으로 향했다. 코를 부여잡은 나에게 약사님은 알러지 약을 내민다. 아무리 급해도 확인할 건 해야 한다.

<녹내장 환자나 심혈 관계 질환 환자는 주의해서 복용하세요.>

주의할 점에서 ‘녹내장’이라는 단어가 단번에 눈에 띈다. 안약을 처방받아 넣고 있는 대부분의 녹내장 환자들은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하면 안 된다. 그렇다.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감기약이나 알러지약을 먹을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 나의 눈엔 좋지 않다. 어쩌다 한 번은 먹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항히스타민이 들어가지 않은 알러지 약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약과 함께 꼬깃꼬깃 접어 넣은 종이 속,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아주 작은 글씨들 중에서도 제법 큰 글씨로 적힌 ‘녹내장 환자‘라는 단어에 선뜻 약을 삼키기 어려웠다.

난 도시에 사는 현대인이라면 많이들 가지고 있는 정도의 비염이 있다. 알러지 반응으로 코가 민감한 편이다. 감기에 걸리지 않아도 사시사철 자고 일어나면 코가 살짝 막히고 재채기가 연달아 나기도 한다. 옷장 정리를 할 때나 환절기엔 보이지 않는 것들의 공격으로 맑은 콧물을 흘린다. 아주 간혹, 알 수 없는 이유로 눈이 맵고 콧물이 걷잡을 수 없이 줄줄 나기도 한다. 불편해도 비염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다가 눈의 압이 낮아지며 의사 선생님은 물론, 온라인 어디에서도 알려주지 않은 불편함이 생겼다.

두 눈에 안약이 들어가면 코와 귀의 문이 활짝 열리는 듯하다. 씁쓸한 안약 맛이 시간차를 두고 느껴진다. 새삼 나의 두 눈과 코, 입, 그리고 귀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학창 시절 과학 교과서의 한 페이지에서 스쳐 본 인간 두상의 단면도가 떠올랐다. 손가락이 닿지 않는 콧구멍의 깊은 곳 어느 좁은 통로가 안약 덕분에 넓어진 듯하다. 아니면 눈코입의 구역을 구분해 주는 벽이 낮아졌다던가… 덧붙여 외부의 침입을 너무도 잘 받아들이고 반응한다. 분비물의 분출을 제어하는 기능이 약해진 것 같다. 코가 이전보다 눈에 띄게 아주 솔직해졌다.

코가 막힐만한 일은 지금 나의 두 눈이 좋아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가장 빠르고 쉽게 알아챈 건 알코올과 카페인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안약을 넣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몸이 보내는 확실한 신호를 받아들였다. 코가 꽉 막힌다. 심하면 귀도 먹먹하게 막힌다. 특히 차가운 기운은 내 코를 마비시킨다. 점심 식사 후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주말 밤의 시원한 맥주는 나의 상태를 염두하고 마셔야 한다. 평소처럼 자주 넣으면 안 된다는 슬픈 사실 역시 나에겐 가혹했다.

낮아진 안압이 정상 범주이긴 하지만 원래 나의 안압보다도 더 낮아지니 코와 귀로 물이 더 잘 들어왔다. 마치 나의 뇌가 스펀지가 된 듯하다. 물을 잘 빨아들이게 된 것 같다. 물속에 깊이 들어갔을 때, 이전의 느낌과 사뭇 달라졌다. 원래도 물놀이를 안 좋아하지만, 유쾌하지 않은 낯섦은 물을 피하게 했다.


녹내장이란 질병이 나에게 왔음이 원망스러웠다. 너무도 젊은 나이에, 제일 건강해야 할 시기에, 지금부터 평생 안약을 넣어야 하고 안약을 받으러 정기적으로 병원에 오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으니 더 화가 났다. 안과선생님은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아채신 건지 매번 별 질문 없는 나에게 먼저, 원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주었다.

“젊은 여성분들의 경우, 신경계가 약한 경우에 녹내장이 일찍 와요. 평소 손발이 몹시 차다던가, 혈액순환이 잘 안 되는 편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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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게 치유 당하고 있어요. 누군가에게 내 글을 보이는게 아주 많~이 부끄럽지만 그 누군가에게 나의 글이 작은 토닥임으로 느껴졌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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