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여름 사이

나의 옛이야기

by grassrain



그의 얼굴윤곽이 오롯이 느껴졌다.

“아 따뜻하고 폭신하다.”

처음엔 이렇게 오동통한 얼굴 볼 살을 계속 만지고 싶다며 양 볼에 두 손바닥을 감쌌다. 그러더니 손의 범주라고 할 수 있는 곳곳의 부위로 내 얼굴이 닿도록 조몰락거렸다. 투박하고 두툼한 손으로 한참을 만지작거리더니 대뜸 자신의 얼굴을 내 얼굴에 갖다 댄다. 그러곤 볼 살을 비비적거린다. 다소 적극적인 다솜짓에 당황했지만 싫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순간을 예상해 왔던 것 같다.


“이렇게 꼭 해보고 싶었어. 네 볼에 내 볼을 대고 싶었어.”

그날 밤은 꽃내음과 풀내음들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왔다. 학교 멀티관 옆 작고 둥근 공원의 한가운데, 벽돌 의자에 서로 기대어 앉아있는 우리에게 가로등은 스포트라이트처럼 느껴졌다. 기다려온 날이었기에 서로에게 기대어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선뜻 내보일 수 있었다. 확인할 수 있었다. 편안히 볼을 맞대고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서로의 어깨에 턱을 괴고 볼을 맞대고 있으니 그의 숨소리가 너무도 잘 들렸다.

‘내 숨소리도 이렇게 잘 들리려나?’ 난 숨을 참았다. 숨을 처음 쉬어보는 것처럼 어색해졌다. 숨 쉬는 거에 집중하다 보니 심장박동과 호흡이 엇박이다. 조화롭지 못한 두 박자를 차근히 분리해서 잘 맞춰보자. 이내 실패다. 머릿속뿐 아니라 온몸이 소극장 연극무대 뒤편처럼 분주하다. 여러 명의 내가 혼란스럽게 각자 하고픈 말을 해대고 있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때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마른 체형이었다. 각지고 강해 보이는 턱과 어깨가 없었다면 오목조목한 뽀얀 눈코입이 더 여성스러워 보였을 거다. 지난 몇 달 동안 나와 5초 이상 눈 마주치지 못했다. 먼저 말을 걸거나 내 가까이에 오는 일도 없어, 아주 내성적인 사람인가 보다 했다. 별말 없이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 쉽게 잊히지 않는 이미지였다. 같은 학과 사람들이 만든 ‘포커페이스’란 별명에 걸맞게 감정과 생각을 쉽게 알아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나 어릴 적 이상형이었던 이모부와 같은 경상도 사람이었다.

볼을 맞대고 앉아있기 딱 일주일 전 그는 나에게 갑작스럽게 고백했다.

“너의 남자친구가 되고 싶어.”

그전에 동기들이 저 선배가 날 좋아하는 거 같다고 말해주어도 아닐 거라 생각했다. 부정했다. 같은 학과에서 누군가와 얽힌다는 게 망설여졌다.

‘난 그렇게까지 선배와의 관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이 사람... 나에 대해 많이 생각했구나... ’

용기 낸 그의 또렷한 마음이 전해지는 순간, 그의 말에서 진정성도 함께 전해졌다. 그리고 나에겐 호감 가는 사람임도 확실해졌다.

볼을 맞대고 기대어 앉아있은지 한참이 지난 듯했다. 미동 없는 이 남자가 혹시 잠들었는지 확인할 겸 볼을 떼며 말을 꺼냈다.

“근데 지금 우리 둘 다 취했잖아요. 날 밝으면 기억 못 할 수도 있잖아요.

“절대 안 잊어버려. 저. 얼. 대. 이걸 어떻게 잊어버려.”

그는 잠들지 않았다. 두 눈은 행복을 짓고 있었다. 예쁜 눈이었다.

“우리 까먹을지도 모르니까 달력에 적어놔요.”

“네가 직접 적어줘.”

말과 동시에 자신의 폴더 폰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쥐어 준다. 자신의 폰을 선뜻 내어주는 그 모습에 살짝 놀랐지만 내색 없이 받아 들었다. 술기운인지 잠기운인지 잘 안 눌리는 핸드폰 버튼을 간신히 눌러 달력에 일정을 저장해 본다.

“자정이 넘었으니까 이제 16일 됐어요. 뭐라고 쓸까요? 그냥 ‘사귀다’라고 쓰면 되겠죠??”


사귁다.


“아하하 하하, ‘사귁다’가 뭐야. ‘사귁다’라고 잘못 썼어요!”

“엇! 지우지 말고 그냥 둬~ 뭔가 더 특별하잖아. 그렇게 기억하고 싶어. 사귁다. 좋은데?”

“그래요? 그럼 내 핸드폰에도 그렇게 저장해 둘게요. 사귁다”


오래된 시간만큼 그날에 대한 기억이 온전치 않다. 하지만 착 달라붙던 볼의 촉감과 온몸을 산뜻하게 쓸어주던 공기는 또렷이 기억난다. 우리는 그렇게 봄과 여름사이, 밤과 새벽사이, 친구와 연인사이를 함께 지나고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딱 알맞은 6월의 어느 날이었다.




<<<< 에필로그 >>>>


그를 처음 본 건 3월 월요일 아침이었다. 아침 9시 친구와 함께 수업을 향하는 길이었다.

“원래 대학 가면 이런 거야? 졸려 죽겠네. 나 고3 때보다 더 열심히 하는 거 같아. 이러고 9시 수업에서 발표를 또 어떻게 해?”

난 평소처럼 말 수 없는 친구에게 주절대고 있었다. 너무 졸리고 피곤해서 아침 해가 유난히 눈 부셨다. 눈을 반쯤 감고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누군가 내 친구를 치며 아는 척하곤 강의실 방향으로 뛰어갔다. 놀란 마음과 호기심에 친구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엇? 형~ 안녕하세요.”

“응. 희철아~ 안녕!”

“아고 깜짝이야. 누구야?! 우리 과에 저런 선배가 있었어? 훈훈하게 잘 생기셨다~ 저분은 여친 있으시다니? 대학 오니까 멋진 사람들도 은근히 있구나~”

유난히 커 보였던 아침 해 앞을 지나가니 역광으로 그 사람의 얼굴은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보였다.

난시 때문인가, 졸음 때문인가. 햇빛이 더더욱 크게 번져 그 선배에게서 후광이 비치는 거 같았다.

내가 여태 기억하는 20여 년 전 강렬했던 그의 첫인상이다.




*** 작가의 말 ***

이 일은 어떤 계절이라 해야 할지 애매한 6월 중순에 일어났다. 일교차가 큰 늦봄? 장마 시작 전 초여름? 같은 학과 선후배에서 남녀사이가 됐다. (그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처음부터 선배로 생각했다.) 이젠 한 가족이 된 이 남자의 핸드폰 달력에도, 나도 ‘사귁다’라고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결혼 16년 차 부부가 되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어떤 계절을 지나고 있을까? 나중에 지금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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