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설명서
엘라좁이라는 안약은 하얀 바탕에 연보라색 글씨가 쓰여있는 작은 박스에 담겨있다. 안에 무엇이 들어있든 빳빳한 새 박스를 뜯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다. 박스 상단 부분에 있는 절취선 안쪽에 엄지 손가락을 대고 살짝의 힘을 가하면 깔끔하게 반원 모양의 구멍이 생기는 그 순간은 정말 좋다. 그와 동시에 들리는 ‘뻑’ 소리는 마음을 튀어 오르게 만들어준다. 백 박스도 넘게 뜯으며 느꼈을 감각일 테고, 백번도 넘게 들었을 소리일 텐데만 어이없지만 좋다. 좋은 건 좋다. 박스를 뜯고 행해야 하는 다음 동작과 전혀 상관없이 마음속 무언가가 뻥 뚫리는 듯하다.
뚜껑을 열면 흰 얼굴 하나가 삐죽거리며 나를 맞이한다. 주요한 무언가를 감싸고 뒤에 숨기는 듯한 종이 뭉치다. 꼭꼭 접혀 돌돌 말려 들어 있다. 그 종이를 보면 껄끄러운 같은 과 선배와 마주치는 기분이랄까? 뭐 엄청 대단한 사실도 아니고 혼자만 알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쓸데없이 진지하고 당연한 말들을 두서없이 늘여놓고 있다. 맞다. 약에 대한 설명서이다. 그리고 그 거추장스러운 종이를 들춰내면 깊숙한 곳에서 하얀 플라스틱 통이 나를 쏘아보며 앉아있다. 뾰족하게 굴며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는다. 어렵게 끄집어내 보면 하얗고 자그마한 게 또 나름 귀엽게 생겼다.
하지만 새로운 안약통은 다시금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새 박스를 뜯어내며 즐겁고, 경쾌한 소리로 가벼워졌던 내 마음은 금세 또 끌어내려온다. 가라앉는다. 새삼 낯설게 느껴진다. 다 사용한 안약 병과 새로 꺼낸 안약 병. 병 두 개를 한 손 씩 쥐어 들고 한참을 들여다본다. 겉모습은 분명 큰 차이 없어 보이지만 새로운 병의 무게가 더 나가서일까? 참… 부담스럽다. 내가 짓눌리기 전에 서둘러 이 쬐끔한 놈의 목을 비튼다. “따다닥” 뚜껑과 몸통 사이에 생겨난 목줄이 분리된다. 이걸 잊지 말고 꼭 빼내야 한다. 이 목줄을 빼내지 않고 점안하면 내 눈동자가 목줄을 차게 될 게다. 차분하지만 확실하게 제거 한 뒤, 다시 뚜껑을 돌려 꼭 잠그고 병을 흔든다. 정신 못 차리게 위아래로 재빠르게 움직인다. 있는 힘껏 세차게 흔들어 재낀다. 그러고 점안한다.
작은 손거울로 희뿌연 액체가 떨어지는 걸 지켜본다. 그리고 첫 한 방울과 함께 빨려 나오는 그놈을 확인한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원수. 마치 우두머리 같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통 안에서 혼자만 튀어나온 야비한 적군. 공깃 방울 하나. 잡았다. 요 놈. 내 눈꺼풀로 덮어 없애주겠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나에게 속박된다. 새로운 안약 하나를 또 길들였다.
초반에 안약을 넣을 때의 난 전혀 능숙하지 않았다. 어설펐고, 나약했다. 당황했고, 외로웠다.
그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겠지. 꼴 보기 싫어도 함께 해야겠지. 우리 서로 친하게 지내보자. 마치 자기소개서를 내민 듯하다. 안약 박스 속에 들어있는 설명서를 쓱 들여다본다.
효능, 용량, 사용상의 주의사항
전신흡수 가능… 교감신경자극… 심혈관 질환… 폐질환… 임부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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