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쓸데없는 것‘ 은 없다. *

글채집 4월 - 작별

by grassrain

정신과 약을 먹고 장기적인 진료는 받는 건 누구에게나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나의 현 상황이 내 일상에 완전히 녹아들었고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말 오전이 되면 가족들 앞에서 약 먹는 게 껄끄럽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좀 조심스러워진다. 약봉지 뜯는 소리가 혹여나 크게 들릴까 주변 상황을 의식하며 재빨리 입에 넣는다. 아이들이 정신과 진료에 관련해서 이제는 더 이상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고 있고, 남편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어 보인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약을 먹으며 병원에 오가는 모습이 나약해 보이고, 죄스러우며, 가족들 눈에 띄지 않아야 할 것 같다.

그렇다. 내가 정신과에 다니고 있다는 게 아무렇지 않지 않다. 매우 아무렇다.

아마도… 어쩌면 나는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믿고 싶었던 게 아닐까. 씩씩해 보이고 싶었던 걸까.

약을 먹기 시작할 때 주변 지인들의 응원을 받았던 때가 떠오른다. 대부분 일 년 정도의 기간이면 약의 도움으로 생활이 편해졌으며 생각보다 약과 병원에 너무 의존하지 않게 되고, 금세 병원마저 가지 않게 되었다는 주변이들의 이야기와 비교된다. 그들에 비해 난 너무 오랫동안 병원을 오가고 있지 않은가? 어느덧 2년 반이 훌쩍 지났다.


또 이렇게 스물스물 생각들이 모여들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걸 보니 또 덜컥 겁이 난다. 이렇게 또 나를 의심하고, 냉소로 흔들기 시작하며, 비관으로만 가득 차질까 두렵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끊어내려면 정신과 선생님에게 말해봐야지. 그러면 정리되겠지.


“선생님, 요즘에 생각이 좀 많아졌어요.”

- 생각은 많이 해도 돼요. 부정적인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않는다면.

“선생님, 저 언젠간 약을 그만 먹을 수 있는 날이 오겠죠?”

- 그런 생각이 들었군요. 그런 생각들은 충분히 할 수 있어요.

ai 같은 톤으로 교과서 같이 당연하지만 오류 없는 정답지 같은 말들로 내 생각들을 요약 정리하게 도와준다.

불현듯 처음에 나에겐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사 선생님의 진단에 물어봤던 질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제가 어느 정도 정상인처럼 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 풀비씨는 비정상인이 아닙니다. 그런 구분은 할 수 없어요. 풀비씨는 조금 불편한 것뿐입니다. 제가 도와줄 수 있고요.

의사 선생님이 삼 년 전 나의 질문에 대한 마지막에도, 지금 나의 질문에 대한 마지막에도 해주시는 대답을 되새긴다.

- 반드시 낫게 할 겁니다. 나아야죠.

선생님이 어떤 당연한 말을 건네 줄지 예측 가능하고 뻔하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에는 진심이라는 강력한 힘이 들어있는 것 같다. 항상 나의 편이 되어 나를 응원해주고 있음이 느껴진다. 나를 진심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며 더 나아지길, 그리고 편안해지길 기원해 준다. 매일 먹는 약과 선생님의 말 한마디 덕분에 내 마음은 꼼꼼히 메꿔져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리고 선생님의 당부에 따라 잊지 않고 약을 잘 챙겨 먹으려 노력해 본다.


어쩌면 병원비와 약값을 줄이고 싶다는 소비 계획은 올해 안에, 아니면 이번 생에 우울증이 낫고 싶다는 속마음이 ‘생활비 아끼기’라는 가면을 뒤집어 쓰고 나온 진짜 마음 같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한 마음을 표현하는 걸 왜 이렇게도 두려워하는 걸까. 나를 제외한 합리적인 명분과 나머지 가족을 위한다는 핑곗거리를 뒤집어쓰고 튀어나온다. 나를 위해 신경 쓰고 나 자신을 챙기고 있다고 말은 하면서 현실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

더불어 ‘괜찮을 거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긍정적인 생각이라며 덮어버리는 합리화도 문제다. 실제로 깊숙한 속 안에서 끓어 넘치려는 불안을 덮으려고만 하는 나는, 이미 다가갈 수도 없게 달궈져 있다. 해결하기 더 어려워진다.

병원비가 좀 들면 어떠하랴. 우울증 약을 장기적으로 먹는 엄마, 아내의 모습이면 어떠하랴. 이기적인 사람이라 보이면 또 어떠할까.

그리고 의사 선생님에게 좀 의지해도 괜찮다. 나만을 위해 소비할 수 있는 여유 시간이 있고 나만을 위해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건 행복한 일이다. 게다가 솔직한 마음과 생각을 털어놓을 수 있는 좋은 전문가를 만났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내 마음, 그리고 나라는 사람을 그 누구보다 전문적이고 객관적으로 더 잘 파악하고 있을 테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이 병원에 오가는 사람들은 항상 많으니 이 병원이 갑자기 망한다거나 나 하나를 상대로 사기 칠 것 같진 않으니 정말 안심해도 된다.


오늘도 글을 쓰며 또 정리한다. 가족을 위한다는 핑계로 만들어 낸 쓸데없는 걱정과 불안을 끊어내 본다. 정신과 약으로, 그리고 선생님의 말 한마디로 지금의 나를 현명하게 붙잡고 편안한 곳에 자리 잡아도 괜찮다. 다른 이의 눈치나 현재 상황을 살피기 전에 나의 진짜 마음이 어떠한지 살피고 답을 구하는 게 정답이다. 굳은 다짐과 함께 잘 알고 있음에도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고 있었던가? 선생님 말대로 정신과 약을 먹지 않는 날은 올 것이다. 조만간은 아니겠지만, 내가 약을 먹지 않아도 되는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 작가의 말 )

4월 소재인 ‘작별’이라는 단어에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버리고 싶고, 정리하고 싶은 쓸데 없는 것들이 아주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간절했던 ‘정신과 약’에 대해 쓰고자 시작한 글이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건강한 내가 되고 싶다는 생각마저 솔직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약을 더 줄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던 지난 달이여서 일까.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아지려 했고 의사 선생님의 대답에 일단락 지어진 듯했다. 하지만 이번 글을 쓰고 나서 정리가 됨과 동시에, ‘쓸데 없는 건’ 없다는 글채집의 구름 선생님의 말씀이 와닿았다. 그 쓸데 없는 것들로 채워진 이 글로 끝이 아니라 연결 지어서 더 많이 써내려 가야 함을 깨닫는다. 글을 한 번 썼다고 정리되는 게 절대 아니다. 반복해서 쓰고 또 써도 같은 생각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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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게 치유 당하고 있어요. 누군가에게 내 글을 보이는게 아주 많~이 부끄럽지만 그 누군가에게 나의 글이 작은 토닥임으로 느껴졌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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