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암동

세상의 끝이 궁금할 때 찾던 장소

by grassrain


며칠 동안 쌓이고 쌓인 묵은 미세먼지에 하늘은 누렇다 못해 거무튀튀한 황색이다. 시야도 숨쉬기에도 답답한 나날들이었지만 이날의 마음만큼은 밝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402번 파란 버스, 그 안에서도 운전기사님 라인 맨뒤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아서 더 기분 좋다. 탁한 공기 속에서도 왠지 더 잘 보이는 거 같고 시야가 뚫려서인지 마음이 더 환해지고 또렷해진다. 남산이 가까워질 때쯤부터 부푼 기대감과 함께 왼쪽을 응시한다. 그리워하던 그 풍경이 비치자 바로 버스벨을 누른다. 정확한 주소도 모르고 십몇 년 만에 찾아왔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직접 와서 보니 오랫동안 생사가 확인된 옛 친구를 만난 듯 기쁘면서 반갑고, 또 안심이 되었다. 인적이 드물고 차소리에 숨어 묵은 감정들을 큰소리 내며 게워내도 될 것 같은데, 메마른 눈코입에선 아무것도 안 나온다.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아름답게 눈물 한 방울 또로록 흘리고 싶었는데... 안 나오니 마르디 마른 내 감수성에 좀 실망스럽다. 그래도 입꼬리는 연신 올라서 있다. 앞에 보이는 마음에 드는 시야에 맞춰 서서 마스크를 벗어젖히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그리고 입 밖으로 어색하게 소리 내어본다. “나 왔다. 내가 다시 왔다!!” 너무 오랜만에 와서일까, 큼직한 풍경은 그대로지만, 소소한 지형지물들은 좀 낯설다.

이 장소를 처음 오게 된 건 아마도 고1쯤일 거다. 평소라면 엄마가 짜 놓은 스케줄에 따르는 버스 안에서 동료 좀비들 무리에 뭉쳐져 학원가에 쓸려 내려갔을 거다. 한데 그날따라 각성 됐는지 몸은 일어날 생각을 안 했고,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학원을 지나쳐 버렸다. 두어 개의 정류장을 더 지나치는 동안 치열하게 고민한다. 버스에서 내리지 말아야 할 이유를 쥐어짜 낸 결과 버스의 반대쪽 끝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할 마음의 이유를 찾았다. 한두 번쯤 봤던 풍경들을 금세 지나치고 낯선 풍경이 시작하자 내 눈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앙상한 나무들의 환대를 받으며 들어서게 된 이 정류장은 남산 중턱에 있어 지대가 높았다. 이 세상은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넓다는 걸 알려주듯, 일정하고 꾸준한 나의 일상에 색감 있는 강약의 리듬감을 보여주었다. 나의 세상이 정말 단조로웠구나, 조금만 나오면 세상은 흥미 가득한 호기심 거리들로 가득한데… 막힌 숨을 트이게 해주는 광경을 두 눈에 박아 주었다.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좋아하는 노래와 함께 반짝이고 화려한 밤 풍경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덧 버스는 마지막이라고 하기엔 좀 허무한 전환점을 돌고 있었다. 처음 겪어 본 일탈에 안전지대인 버스에서 내릴 엄두도 못 내고 그 버스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 세 번째 학원 땡땡이는 쉬웠고, 철없던 고등학생은 아침부터 저녁의 버스 여행을 계획하는 날도 생겼다. 잠깐의 자유 의지도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에 스스로 알아낸 나만의 첫 자유로운 취미생활이 생겼다. 몇 번의 402번 버스 투어를 하던 중 용감하게도 어떤 정류장에 내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양한 모양의 집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이로 난 좁은 골목들은 미로같이 복잡하게 얽혀있었고 예쁜 불빛들이 불규칙하게 수놓아져 있는 곳이었다. 동화 속 마을 같이 신비로워보이 기도 하고 길치에 이방인인 내가 들어가면 못 빠져나올 거 같이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어리고 겁 많은 여고생은 용기 내어 버스정류장에 내려서도 기껏 동네 입구만을 겉돌며 멀리서 보이는 풍경에 감탄하고 기웃거리기만 했다. 성스러운 골목 안으로 감히 학원땡땡이친 범죄자는 들어갈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그 뒤로도 몇 번 402번 버스 여행은 반복되었지만, 대부분 버스에 앉은 채 유리창에 바짝 붙어 구경하며 그 정류장을 지나치기만 했다.

두 번의 대입시험과 입학, 취업, 결혼과 임신, 그리고 출산과 육아로 몽땅 다 잊고 살았다. 그러다 둘째 모유수유로 잠을 제대로 못 자는 밤들이 낮과 뒤엉켜져 생각인지 꿈인지 헷갈리는 나날들 중 그곳을 거닐고 있는 나를 꿈꿨고, 언젠가 현실에서 저 미로 골목들 사이로 뛰어들어가보리라 결심했다. 둘째 아이가 4살 되던 해 나만의 시간이 조금은 길어진 봄날. 문득 동네에서 서울 남산 근처로 가는 빨간 버스를 본 나는 다짜고짜 올라탔다. 가는 길엔 기대에 부풀어 금세 꿈속의 장소에 도착은 했지만, 실제로 가게 된 그 장소는 실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미세먼지가 너무 자욱해서인지 시간이 오래 지나서인지 그토록 그리워하던 시야가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또렷이 보이지 않았고 꿈속에서의 느낌과도 사뭇 달랐다.

너무 늦게 확인 한 이 정류장 이름은 보성여중고입구란다. 발달된 문명의 힘으로 알아낸 동네 지명은 후암동. 왠지 동네 이름이 예스러우며 고풍스럽다. 지금은 개성 있는 유명 연예인이 오래된 고급주택을 멋지게 공사해 살고 잇고, 골목골목 예쁜 카페와 아기자기한 가게가 많아 입소문 난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난 다 필요 없고, 막상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별 볼 일 없어 실망하는 건 아닐는지... 무언가 엄청난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내가 왜 여기까지 뭐 하러 왔나 현실자각타임도 살짝 온다. 그리고 문득 집에 애들 하원시간에 맞춰 돌아가지 못할까 겁 나기도 한다. 정류장 주변을 한참 서성이다가 골목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만발한 개나리꽃의 볼터치를 시작으로 한 계단 씩 내려갈수록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아마도 인류가 달에 발 디딛는 것 보다 더 큰 짜릿함이 내 발에 닿았다. 난생처음 보는 도로 표지판을 시작으로 상상하지도 못한 동네 모습과 분위기에 나는 관광객처럼 매 걸음걸음마다 사진을 연신 찍어대며 신비로운 매력의 풍경과 시간을 기록하고 저장하려 애썼다. 역시나 핸드폰 네비의 오차 범위에 들 정도의 겹겹이 쌓인 좁은 골목 안에서 길을 잃어버림을 깨달았을 때 당황은 잠시, 마치 내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듯한 묘한 만족감에 사로잡혔다.

배고파져 들어간 어느 작은 카페는 마치 판타지 소설 속의 신비로운 잡화점처럼 오래되었고, 주문하는 테이블 위엔 이상한 조합의 잡동사니들이 뒤죽박죽 섞여 어디에서 주인을 불러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나 빼고 모든 게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게다가 가게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산도적 같은 현실 주인까지 합쳐져 비현실적인 상황에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주문 뒤, 돌아 서서 자리를 탐색하던 내 눈길을 기다렸듯이 먼저 눈인사를 건네는 단골처럼 보이는 어여쁜 백인 손님까지.. 반전의 반전의 반전의 연속. 마치 거울 속에 거울이 있어 왼쪽, 오른쪽이 헷갈리는 것 같다. 바닥에 맞닿아 있는 내 발바닥에 집중하고 걸어야 그 세상 속으로 빠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마술 상자 속 같았던 카페와 다양한 매력들의 골목길들을 구경하며 놀랐다가 즐거워했다가. 어느 유명한 관광지보다 나에겐 강렬한 기억이 남는 장소가 생겼다.


이곳을 왜 그렇게 그리워하고 꼭 다시 오고 싶어 했을까?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이 이 장소에 오면 자유로워지던 기억이 떠올랐나? 힘든 나를 위로해 주려는 알 수 없는 힘이 내 몸을 그곳으로 이끌었을까? 육아로 인한 괴로운 외로움이 그 시절의 감정과 맞닿아 있었나? 사람은 괴롭고 힘든 일을 주기적으로 겪으며 살아야 한다는 깨우침? 기억에 남을 멋진 풍경을 가진 정류장이라서? 앞으로의 내가 또 저 동네를 오고 싶어 할까? 이 장소가 그대로 있어줄까? 란 수많은 궁금증과 함께 확인하러 기필코 다시 또 와보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나만의 비밀 장소가 무자비한 개발로 인해 언젠간 없어질 거란 예상과 나 또한 계속 변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 습작노트 ***

글쓰기의 주제가 장소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곳이었다. 인생에서 힘든 시기가 또 오길 바라진 않지만 이곳을 다시 찾을 땐 또 새로운 힘든 시기를 지나면서 일지도 모르겠다. 먼 훗날 이 장소에게서 위로받았던 어리고 젊은 나 자신과 과거의 후암동 모습을 그리워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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