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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ce May 24. 2024

꾸밈 내려놓기의 역사

정들었던 속눈썹 연장과 컨실러 떠나보내기

고등학생이던 나는 여드름성 피부에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민낯은 대체로 붉었고 빛깔은 균일하지 않았다. 타고나길 피부가 좋은 친구들이 어찌나 부러웠는지,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피부화장을 시작했다. 처음엔 톤업선크림, 그리고는 비비크림, 쿠션파운데이션을 발랐다. 

대학생이 되어 가장 재미있었던 점은 마음껏 치장해도 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침 7시 반에 알람을 맞추고 일어나는 것은 너무 설레는 일이었다. 씻고 나와 선크림, 파운데이션, 컨실러를 발라 피부 결점을 가렸다. 아이라인, 마스카라, 블러셔, 틴트까지 바르면 진짜 내가 완성되었다. 성인이 되고는 마음껏 맨얼굴을 가릴 수 있어서 기뻤다. 나는 긴 파마머리와 메이크업한 얼굴을 방패 삼아 지냈다. 


불규칙한 생활습관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빼먹지 않은 화장이 피부를 얼마나 괴롭혔을지 모른다. 이십 대 후반이 되어 직장생활을 하던 중에도 나는 얼굴을 가리느라 급급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트러블성 피부가 다시 예민해져, 피부과를 다니면서도 피부 화장은 놓을 수가 없던 중이었다. 

학창 시절 중 억눌려온 꾸밈 욕구가 폭발하기 시작한 대학생 때와는 달리, 회사에서는 사실 내가 화장을 하든 안 하든 내가 일을 하고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인적 자원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단정한 외모는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은 물론 인정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대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듀얼 모니터 앞에 8시간 동안 앉아있으려고 1시간 일찍 일어나서 화장을 하고 있는 꼴이 우습고 부끄러웠다. 


그러다 첫 번째 회사를 그만두고 특수대학원에 진학했으며 잠깐의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입사했다. 감사하게도 일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는 환경이었고, 나는 수업이 있는 주 2-3일은 발 아프게 달려가 수업을 들었다. 아이패드와 수업자료를, 어떤 날엔 회의 자료까지 짊어지고 돌아오는 귀갓길이었지만 행복했다. 거울을 보면 머리는 질끈 묶은 채였고 얼굴은 엉망이었지만 스스로가 멋져 보였다. 나는 일과 공부, 미래 설계를 해낼 수 있을 만큼 건강하고 싶었고 그 외의 것들은 거추장스러워졌다. 


 3년 가까이 고집해 온 속눈썹 연장을 포기했다. 한 달에 많게는 10만 원까지 들어가는 비싼 취미였으며 눈 건강에도 좋지 않았다. 나는 피곤하면 눈을 비비고 싶었고, 속눈썹 숱이 빈약해져 스스로가 못생겨진다는 우스운 느낌으로부터도 벗어나고 싶었다.

트러블 자국을 가리는데 필수였던 컨실러를 포기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컨실러란 용량은 적은 주제에 아주 비싼 편이고, 농도가 짙어서 내 피부를 숨 못 쉬게 하는 괘씸한 잉크에 지나지 않았다. 

대신 매일 빠르게 바를 수 있고, 눈도 시리지 않은 선크림을 하나 구매했다. 출근 준비 시간은 30분으로 단축되었다. 저녁이 되면 피부화장이 들뜨거나 톤이 칙칙하게 변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만 아는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던 '꾸밈 내려놓기'의 소감이라 하면, '정말 아무도 모른다'로 요약할 수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 친구, 남자친구도 내 얼굴에서 어떤 부분을 덜어냈는지 잘 알아내지 못했다. 내가 한 달에 10~20만 원, 시간으로는 하루에 2시간 정도를 절약하는데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란 미미하구나, 사실 차이가 있다 해도 그게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구나 깨달았다. 


요즘도 나는 중요한 만남이나 회의가 있으면 정성 들여 화장을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건강하고 생기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고, 친구들과 사진이라도 찍는 경우에 대비해 예쁜 모습으로 그들을 만나고 싶다. 그렇지만 이제 그것은 내게 선택사항이 되었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할 시간이 없으면 생략한다. 화장한 얼굴이라는 허구의 방패에 매달려 그날 하루 내 가치를 깎아내지 않아도 된다. 외모 집착이란, 그냥 나만 신경 쓰는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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