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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리모아 Jul 22. 2024

라쇼몽 -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문학 작품 속 상징적 의미 해석

  문학 작품이나 영화에는 종종 뜻모를 의미심장한 장면이나 물건 등이 여러번 등장하곤 한다. 이러한 소재에 대한 해석은 종종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나 어렸을 적만 해도 소나기의 보라 꽃이 나오는 이유는 죽음을 암시하는 복선이라고 배웠지만, 황순원 작가에게 직접 확인해보니 그냥 좋아하는 꽃이라서 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이런 공식화된 해석에 불만을 품으며 이러한 해석은 도대체 누가 정하는것이며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항상 궁금해 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며 비평에 관심을 가지게 된 연유도 그러한 무의식적 불만과 무관하다 할 순 없을 것이다.  

 어쨋거나 내가 좋아해마지않는 작가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소설 라쇼몬도 인터넷에 제대로 된 해설 하나 찾기가 힘들다. 특히 소설 속에 자주 묘사되는 여드름을 만지작 거리는 장면은 처음에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장면이다. 우연히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며 이 장면에 의문을 품고 인터넷에 검색해봤을 때 속 시원히 아 이거다! 하는 해석을 찾지못해 답답했던 기억이난다. 오랜세월이 지나 선생이 되어 학생집에서 우연히 이 책을 다시 읽으니 이제는 선명하리 해석이 쉽게 되는 것이 아닌가? 여전히 인터넷에는 나와 비슷한 분석을 한 글은 찾기는 힘들었다. 이 정도로 유명한 작가임에도 제대로 된 분석하나 없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쓸 용기를 내게 만들얼다.

물론 내 해석이 100% 작가가 의도한 정답은 아닐 수 있겠으나, 그래도 오랜 고민 끝에 나름의 합리적인 방법으로 내 스스로를 납득 시킬 수 있는 독해 원리를 찾아내었다. 최소한 방법론적으로 나와 같은 내재적인 작품 접근방식이 가장 왕도에 가까운 해석 방법이라 생각한다. 경험적으로 작품에 쓰인 특정 소재에서 작가의 의도를 해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교과서적으로 작가의 주제의식과 관련지어 맥락을 읽어보는 방법이다. 맥락을 읽는다는 것은 작품의 인물과 사건 배경과 같은 작품의 주요 구성을 분석하고 그 특징이 주제와 어떻게 연관되는 것인지를 알아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선생님이 입장으로 우리나라의 국어교육의 가장 문제야말로 이러한 추론의 과정을 건너뛴 결과를 암기시키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작품 속 특정 단어에 대한 해석은 반드시 작품에 의도된 모든 문장들과 정합적으로 모순없이 연결되어야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순 있으나, 완성도가 높은 작품일수록 작가의 의도와는 혹은 작품의 주제와는 무관한 단어를 찾기는 힘들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단어는 작가가 굳이 넣은 단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좋은 소설 속에서 무의미한 단어를 발견하기란 좋은 요리에서 요리사가 의도하지 않은 재료를 발견할 확률과 같다. 좋은 요리 일수록 그 안의 모든 요리재료가 요리사가 표현하고자 하는 맛을 위해 의도적인 순서와 조합으로 요리에 들어가듯이, 좋은 소설일수록 그 소설 속 모든 단어들은 당연하게도 주제를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에따라 배열되었을 수 밖에 없다. 굳이 이유없는 묘사나 소재를 넣으면 그 재료는 오히려 주제를 흐릿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라쇼몽의 주제는 무엇인가를 분석해보자

나는 항상 학생들에게 작품의 주제를 알기 위해서는 '주요 인물의 성격이 어떤지', '그리하여 그 갈등이 어떻게 해소되는지' 등을 분석해보라고 요구한다. 게다가 이 소설에서는 나생문이 제목으로 쓰일 정도이고 소설 내용에서도 배경에 대한 묘사가 적지 않으므로 작가는 배경이 주제의식에 기여하도록 의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인 나생문은 교토의 남문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문이라기엔 전란의 시기 전염병과 기근까지 돌며 죽은 온갖 시체들이 버려져 썩어가고 있는 지옥과 같은 곳이다. 가히 아포칼립스 물의 시초라 할 수 있을 정도다. 그곳에 소설의 등장인물을 보내어 생각과 심리가 변하도록 만드는 것이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작가의 보이지않는 의도로 의해 나생문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이 불쌍한 등장인물은 과연 어떤 인간일까? 나생문에서 마주치는 두 인간이 노파와 하인이라는 점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사회로부터 관심받지 못하는 하인과 노인은, 물론 시절이 평화롭다면 평범하게 살다 천수를 누렸을 지도 모를 그런 인간들이다. 어떨 때에는 정의감을 느끼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악한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흔하디 흔한 성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의 극한으로 치달을 때 가장 먼저 버림받는 것은 이런 평범한 약자들일 것이다. 실제로 하인은 일자리를 잃고 떠돌던 중에 우연히 비를 만나 나생문의 누각으로 올라가게 되고, 나생문은 그런식으로 극한상황에서 버림받은 희생양들이 서로를 속이고 해치다 결국 모이게 되는 공간인 것이다. 노파를 만난 하인이 노파와의 대립 끝에 결론적으로 도적질을 저지르지만 이 소설에서 자세히 묘사하는 것은 그 둘 사이의 갈등보다도 하인의 심리 상태의 변화이다. 노파를 보며 연민을 느끼다가도 노파의 합리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하인은 진작부터 해오던 고민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얻게 된다. 즉 이 소설의 전반을 아우르는 핵심 갈등은 악행을 저지를지 말지 고민하는 하인의 내적 갈등이며 그 갈등의 해소는 노파의 말을 들으며 하인이 악행을 저지르기로 결정하는 것으로 끝맺어 지는 것이다.

  이로부터 작가가 의도하는 주제 의식은, '평범한 인간도,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는 생각이 아닐까. 이 세상에는 태어날 때부터 악행만 저지르는 악인, 아무런 계기 없이도 범행에 쾌락을 느끼는 선천적 사이코 패스들보다는 어떠한 극한의 상황에 몰리고 몰려 어쩔 수없이 악을 저지르는 악인이 훨씬 많을 것이다. 우리는 악인을 마치 우리와는 선천적으로 다른 괴물보듯이 취급하지만 우리도 누구나 그런 위치에서 그런 상황에 몰린다면 과연 우리는 신념을 지킬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이 작가가 지적하고자 하는 지점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인은 왜 자꾸 여드름을 만지작 거리나, 내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종종 원문을 무시한 채 자신만의 논리를 만들어 대답한다. 혹은 공부를 좀 한다하는 학생은 어디서 들었을법한 교과서의 해석을 흉내내곤한다. 예를들면 "여드름은 사람을 못생기게 만드니까 하인의 추악한 본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다."와 같은 대답이 그러한 오답일 수 있을 것이다. 한 술 더 떠 이런 주장을 한 후에 "문학에 정답은 없잖아요 선생님!"과 같은 말까지 콤보로 들어오면 정신이 살짝 아득해진다. 물론 100% 틀렸다고 할 순 없겠지만, 이런 해석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주장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맞을수도 틀릴수도 있는 주장은 무한히 만들어낼 수 있을 뿐더러 소설에서 그 증거를 찾아낼 수 없기에 들었을 때 납득이 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내용에 근거해 의미를 해석해야한다고 항상 가르친다.

소설에서 4번에 걸쳐 등장하는 여드름은 하인이 여드름을 만지작 거린다는 묘사와 그리고 빨갛게 익어 곪아있다는 두가지 문장으로 묘사된다. 내가 생각하는 합리적 추론은 이 묘사의 지점에서 시작해서 주제로 향해야한다. 곪아있는 여드름을 만지작 거린다는 말을 해석해본다면, 하인이 터지려하는 혹은 터질 수 밖에 없는 여드름을 신경쓰고 있으며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무의식적으로 고민하는 중이라는 말과 같다. 그렇게 해석을 해야만 노파의 말을 들으며 여드름을 만지작 거리는 하인의 모습이 악행이라는 곪아 있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모습과 은유를 이루며 작품 전체의 주제의식을 가리키게 되기 때문이다, 작품 안에서 하인 외에 여드름 가진채로 사다리 아래에 있던 사내의 모습이나, 노파의 말을 듣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여드름을 만지작 거리기를 멈추고 결정을 내리는 모습 등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드름은 모두 고민과 악행의 상황과 함께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평론가라면 여기서 더 나아가, 작품에 묘사되지 않은 여드름의 특징을 통해 심층적인 분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들어 주로 어린(미성숙한) 인간에게서 많이 나타나지만 사실은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다는 점, 혹은 여드름이 터지고 난 자리에도 흉이 남아 흔적이 남고 많이 쌓이게 되면 그것이 내 정체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 등등....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혹은 무의식적으로 의도했을 수는 있는) 그리하여 소설에서 근거를 찾을 수는 없지만 주제와 정합하는 해석을 여럿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런 해석이 아까 내가 예시로 들은 학생의 억측과 뭐가 다른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르다. 평론가의 해석은 작품에서 출발하고, 학생의 해석은 자신의 가설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학생들이 처음보는 작품을 접할 때, 여기 살인현장이 있으니 주제라 하는 흉기를 찾으라고 주문한다. 억측하는 학생의 추리는 명탐정 코난의 유명한이 하는 관상을 보고 찍는 행위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범죄자 같은 인상을 토대로 범인을 먼저 고르고 그 이유를 작품 안에서 찾기 시작한다. 이 경우에는 어차피 답을 먼저 고르고 증거를 찾기 시작했기 때문에 범인을 맞히든 못 맞히든 큰 의미가 없게된다. 추리의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셜록홈즈나 코난 같은 프로파일러들은 범행현장의 모든 사소한 증거를 종합하여, 범인의 습관, 행동, 범행동기를 추리함으로써, 범인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무의식을 밝혀내곤 한다. 백종원 아저씨가 골목식당 30년 경력 아줌마들이 추구하는 맛이 무엇인지 그 아줌마보다 더 잘 분석하여 필요한 재료가 무엇인지 충분히 컨설팅 해줄 수 있듯, 프로페셔널한 평론가라면 작품 속 소재들로부터 작가의 의도를 작가 자신보다도 더 정제된 형태로 정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라쇼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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