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만 보면 나의 대학원 생활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급하게 대학원을 지원해서 받아주는 곳에 갔고, 중간에 연구 주제도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열심히 해야 할 동기도 잃었고 교수님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즐겁다고 생각했다. 일단 랩실 사람들이 좋았다. 동기들과 재밌게 지낼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도 즐겁게 지냈다. 아마 랩실 사람들 덕분에 2년이라는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거 같다. 또한 대학원 덕분에 취업도 했으니,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사실 대학교 4학년 취업 시즌이 되면 대학원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하게 조언한다.
‘도피성 대학원은 최악이다.’ ‘단순히 취업하려고 대학원을 가지 마라’
나는 도피성으로 대학원을 갔고 좋은 랩실을 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학원도 교수님 성향에 따라 많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돈도 많이 받고 성과도 나면서 매우 만족해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만족해하지 못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후자일 것이다. 나도 지금 돌아보면 누구보다 최악의 대학원 생활이었던 거 같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돌아가서 선택하게 된다면 대학원을 선택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취업의 난이도가 매우 쉬워진다. 나는 학부생으로서도 취업 준비를 해봤고 석사 졸업생으로도 취업 준비를 해봤다. 학부생으로 원하는 기업을 가려면 높은 학점과 직무와 연관된 많은 스펙이 필요하다. 특히 요즘은 인턴 자리도 많이 있어서 인턴 경험 있는 사람이 많고 대학원에서 하는 학부생 인턴을 한 사람도 정말 많다. 이러한 고스펙 중에서도 남들과 다른 점을 어필해야 된다. 그러나 석사 졸업생은 자기가 연구한 것이 스펙이자 남다른 점이다. 석사생이 SCI논문이라도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아쉽게도 나는 1 저자 논문은 없었지만, 이 부분이 발목을 잡은 적은 없다. 그만큼 석사 생활 2년을 하면서 취업 허들이 매우 낮아진다. 추가적으로 내가 원하는 기업이나 직무가 있어서, 관련 교육을 수료하거나 자격증을 딴다면 허들을 기하급수적으로 낮출 수 있다. 아무 논문이나 특허 없이 그저 석사 졸업생이라는 타이틀로, 배터리 최고 회사와 반도체 최고 회사를 붙었다. 물론 최고 회사인 만큼 많이 뽑기 때문에 가기 더 쉬운 것도 맞고, 취업운도 있었다. 그러나 취업 난이도가 낮아진다는 것은 변함없다.
두 번째로는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대학원을 가게 되면 연구 주제와 연관성이 있는 직무만 지원할 수 있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고 말한다. 박사는 내가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르지만 석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석사 연구도 깊게 하지 않기 때문에 전문성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 박사는 애초에 경력직으로 가고 박사 수당도 있지만, 석사는 학부 졸업생과 큰 차이가 없는 걸로 봐서는 기업에서도 ‘전문성’이라는 점은 크게 인정하지 않는 거 같다. 나도 태양전지를 연구했지만, 이차전지 회사와 반도체 회사에 합격했다. 또한 랩실에 있다 보면 한 가지 주제로만 실험하지 않는다. 여러 프로젝트에 참가해서 다양한 실험을 할 것이다. 어떤 프로젝트는 발만 담그고 어떤 프로젝트는 메인으로 할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실험을 하고 다양한 장비를 다루기 때문에 그만큼 얇게나마 아는 것이 많고 다양한 직무에 지원할 수 있다. 반도체나 배터리 같이 특정 산업만 실험하는 랩실이어도, 본인이 준비하는 것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산업군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는 얻는 것이 많다. 학부 때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실험도 하고 새로운 지식도 얻는다. 또한, 직접 장비도 사용하고 데이터를 정리하면서 해석하는 역량도 키운다. 이런 직무를 위한 역량을 많이 배우지만, 어떤 랩실 출신이라는 타이틀을 얻는다. 어떻게 보면 인맥을 얻는다고 볼 수 있다. 건너서 듣기로는, 석사는 인맥을 구축하러 가는 곳이고 박사는 연구를 하러 가는 곳이라고 한다. 석사가 그만큼 아는 게 없다고 말하는 거일 수 있지만 어쩌면 그만큼 랩실 인맥이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회사에서 석사를 나왔다고 하면 어디 랩실 출신인지를 무조건 물어본다. 이전 회사에서는 역사 깊은 랩실의 경우, 랩실 출신들끼리 주기적으로 모임도 가졌다. 이런 것이 결국은 미래에 나를 지켜주는 힘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온 랩실은 역사가 깊지도 않고, 교수님이 이런 구심점 역할도 하지 않아서 모임 같은 것은 없는 거 같다. 그럼에도 나와 같이 대학원 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나에게 소중한 인맥이고, 미래에 혹시라도 나와 같은 랩실 출신들을 만나면 큰 힘이 될 거 같다.
나의 대학원 생활은 평범하지만 누구한테는 최악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 나조차도 석사 진학은 추천한다. 회사에 가서 학사와 대우 차이는 없지만 아는 것이 다르다. 2년 동안 그리 열심히 실험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학사 출신과는 아는 것이 다르고 보이는 것이 다르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그러나 이런 역량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미래에 대한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박사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고 취업의 길에서도 여러 직무를 선택하고 원하는 기업과 직무에 갈 수 있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