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구멍 통과하기'라는 취업시장이었지만, 자신감이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기업들의 수익이 악화되면서 취업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난 석사 졸업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2년 전 아무 스펙 없이 그저 대학교 졸업장만 들고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을 때랑은 다른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보상심리일 수 있다. 2년 동안 월급으로 80만 원만 받으며 아침부터 밤까지 실험을 했다. 이 정도 했으면 취업은 쉽게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사실 막연한 생각은 아니었다. 랩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원하는 곳에 취업취업하는 것을 보고 그저 내 미래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2년 전과 똑같이 난 취업시장의 한파를 다시 느꼈다. 오히려 더 춥게 느껴졌다. 지원했던 기업을 모두 서류탈락 했으니 말이다.
정말 무모한 자신감이었다. 졸업 학기 때 2개의 기업에만 지원했다. 반도체 쪽으로 가고 싶었기 때문에 반도체 회사 2곳만 지원했다.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우선 마지막 학기였기 때문에 석사 졸업 논문을 써야 했다. 학사 졸업논문은 대충 글자수만 맞으면 통과시켜 준 반면 석사 논문은 나름 내용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물론 박사과정만큼 빡빡하게 디펜스를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형식은 갖춰져야 하며 무엇보다 지도 교수의 눈높이 수준에는 맞아야 했다. 그래서 마지막 학기 때 졸업 논문도 쓰면서 취업 준비를 하기는 생각보다 힘들다. 또한 대학교 4학년 취준 생활 때는 정말 많은 기업에 지원했다. 그저 화학공학이 지원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지원했다. 화학공학의 전통 강자 기름집, 석유화학부터 시작해서 자동차 회사, 반도체 회사, 배터리 회사, 바이오 회사, 심지어 상사에도 지원했었다. 급하게 취업 시장에 뛰어드는라 원하는 산업군이 없었고 관련 스펙도 없었다. 어차피 아무 스펙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회사나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인적성이나 면접이 연달아 있었고 공부할 시간이 적었다. 면접 탈락 후 느낀 것은 내가 스펙이 없는 것도 있지만 면접 준비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석사 취준 때는 딱 원하는 기업만 쓰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다른 곳은 붙어도 안 가고 그저 시간낭비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의 생활에서 2% 이자의 예금은 손해라고 말한다. 백만 원을 넣어서 1년에 2만 원을 벌지만 손해이다. 왜냐하면 물가 인플레이션이 2%을 넘기 때문이다. 돈의 가치는 이미 2% 넘게 떨어진 것이다. 석사의 취업 시장도 이와 비슷하다. 2년 동안 고생해서 석사 졸업장이 생겨 취업시장의 강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취업시장은 2년 전과 동일한 상황이 아니었다. 취업 인플레이션으로 취업 시장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고 취업 인플레이션을 이길만한 강력한 무기가 필요했다. 석사 졸업장은 취업 인플레이션보다 낮았다. 무모한 자신감으로 2곳만 지원한 나는 서류탈락이라는 쓴맛을 봤다. 첫 번째 기업의 탈락 소식은 견딜만했다. 어차피 2곳 중 더 가고 싶은 곳은 다른 곳이었고 다른 곳만 붙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머지 한 곳도 떨어졌다. 그날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같은 기업에서 2년 전에는 인적성에서 떨어졌지만 이번에는 서류에서 떨어지니, 마치 내가 더 후퇴한 느낌이었다. 내가 이렇게 쓸모가 없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우울해하자 그날 친구가 학교까지 와서 같이 치킨을 먹으며 위로해 줬는데, 그날이 잊히지 않는다. 세상이 무너진 거 같았지만, 다음날 일어나니 아무렇지 않았다. 똑같이 학교에서 가서 실험을 했다. 생각보다 친구의 힘은 크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가진 것은 석사 졸업장 하나뿐이었다. 누군가는 그것이 엄청 크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졸업장만 너무 믿고 있었다. 취업시장에서 나의 상대는 똑같은 석사생들이었다. 그들도 똑같이 석사 졸업장을 갖고 있었기에 나와 다를 게 없었다. 심지어 나의 연구 분야와 내가 지원하는 산업군은 달랐기 때문에 나에게 이점은 하나도 없었다. 이 부분을 간과하고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취업 준비를 했다. 그 결과 쓴맛을 봤고 취업 준비를 처음부터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