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지혜

by Yongmoon Kim

행위론적 맥락에서 항상 우리는 중층적 현실 안에 살고 있다. 말이 어렵다. 풀어 얘기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과 무엇의 관계를 물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돈’과 ‘친구’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섞어야 하나를 고민하기도 한다. 혹은 이민자의 경우 내가 한국인인지 미국인인지 그 사이에서 끊임없는 고민을 하기도 한다. 종교인의 경우에는 종교적 교리와 삶의 문제 사이에서 고민하기도 한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일화가 아마 가장 고전적인 예시가 아닐까 싶다.


‘타인에 대한 경계’와 ‘삶의 지혜로서 친절’을 어느정도로 섞어야 하는가의 문제도 이와 똑같은 문제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언제 타인을 경계해야 하고 언제 타인에게 친절해야 하나의 문제를 항상 고민하게 된다.


젤리저(Zelizer, 2005, ‘The purchase of intimacy’)의 도식을 빌리면 사람들은 이러한 ‘두 가지’ 간의 관계를 ‘환원’, ‘분리’, ‘공존’ 중 하나의 모습으로 정리하고 있다. 말이 또 어렵다. ‘환원’이라 함은 무조건 한 쪽으로 생각하려는 모습이다. 가령 ‘항상 누군가에게 차가워라’라던지, ‘항상 누군가에게 친절해라’와 같은 조언들이 있다. ‘분리’라 함은 둘을 엄격히 구분하려는 모습이다. 예를 들어 ‘친절한 사람에게는 절대 경계를 하지 마라. 모든걸 주어라’ 의 모습일 수 있겠다.


‘공존’의 관계가 가장 어렵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같은 사람에게도 친절과 경계를 계속해서 섞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우리가 매일 마주해야하면서도 대단히 어려운 협상의 과정이다. ‘누구에게 언제 친절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협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협상의 과정을 어려워하는, 싫어하는, 혹은 맹신적인 사람들은 환원과 분리가 많이 나타난다. 즉 ‘항상 누군가에게 차가워라’ 라던가 ‘항상 친절해라’ 라는 조언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협상을 수행해내는 사람들을 나는 ‘삶의 지혜’ 혹은 ‘어른’이라고 부른다.


작년인가. 동네 인근에 LH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공사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대번에 ‘우리 애들을 LH에 사는 애들 같은 초등학교에 보낼 수 없다’ 라는 현수막이 걸렸던 기억이 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들의 말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들은 ‘환원’하고 ‘분리’하는, 단정짓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애들이 누구와 놀아야 할까’라는 문제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거치지 않고 얄팍한 상식으로 즉답을 내놓는 사람들이다. 대개는 ‘내가 살아보니 가난한 집 애들이 그렇더라’ 라는 얘기들이 많이 나온다. 사실 이건 상관관계라고 부르기도 미안한 ‘매우 좁은 표본을 가지고 매우 짧은 생각을 거쳐 나온 매우 편협한 귀납 추측’일 뿐이다. 사실도 진리도 삶의 지혜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어른’이 아니다.


우리는 어렵지만 이 협상의 과정, 공존을 항상 논의해야 한다. 무언가 질문에 대한 설명적 측면에서 그것은 가장 포괄적이고 보편적 틀이기 때문에. 실천적 측면에서 그것은 우리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따라서 아래와 같이 이 중층성을 헤쳐나가는 법, 공존시키고 협상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진짜 성숙한 어른의 지혜이고 현명함이다. 언제나 옳은 진리라는 생각을 답으로서 바로 말하려는 사람보다, 의심을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을 어른으로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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