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 국내 작가의 단편선을 가지고 소설 읽기 세미나를 진행했다. 단편들 전체에 걸쳐 왜인지 계속 ‘얕다’는 느낌이 반복적으로 들었다. 이에 대해 세미나 도중 가장 공감이 됐던 평은 소설이 너무도 전형적이었다는 의견이었다. 특히 여성의 경력단절과 모성, 자아의 상실을 주제로 한 작품에서 주인공이 마치 ‘전형적 여성차별의 화신’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왜 '전형성의 화신'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에선 어딘가 아쉬운 느낌이 들까? 아쉬움과는 별개로 이런 소설이 대다수의 공감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전형성이라는 것은 보편성이고, 실천적으로 차별의 경험들을 대다수가 보편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따라서 보편성을 발견은 곧 자신의 발견이고 공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존 듀이가 지적하듯 미적 쾌감은 곧 보편의 발견이기도 하다. 오늘날 ‘힐링’이나 ‘위안’, ‘공감’의 유행도 이런 맥락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공감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 있다. 좋은 작가들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에서 더 나아간다. 이유를 짚기 위해 잠시만 사회학으로 넘어가보자. 사회학은 한 문장에 정의 하기가 어려운 학문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부족한 탓이고 이론적, 경험적 연구범위가 매우 넓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회학을 한 문장에 말하자면 구조(structure), 행위(action), 변동(change)에 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구조와 행위를 분리해서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일단 차치하고)
전형성으로 도배된 소설이 얕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 구조-행위-변동에 있다. 소설에서의 전형성을 사회학에서의 구조로 본다면 이런 종류의 소설들에서는 오로지 구조만 드러난다. 인물들은 구조의 함수가 된다. 그러다보니 ‘행위’에 대한 부분이 드러나지 않고, 결론적으로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갈 수 없다. 변화는 행위성이 고려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 이론에서는 해방력을 찾아볼 수 없다. 구조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행위를 통한 변화의 가능성이 존재해야 한다. 단순한 공감과 통찰의 차이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아울러 실제로도 행위가 오로지 구조로 환원되는, 구조만의 결과물은 아니다. 행위 안에는 무언가 더 (최소한 다른 구조라도) 담겨 나가기 때문이다. 또한 구조 역시 하나의 통일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일치하는 여러개의 구조들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개인 내부에서 구조와 구조의 공존, 구조와 행위의 공존 혹은 그것의 일치. 더 나아가서는 ‘나’와 세계, 여러 개인들의 공존 가능성. 이것이야 말로 구조주의(혹은 전체주의)와 개인주의를 넘어 던져야하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다. 무엇이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가?
그럼에도 신인 작가의 책은 반가웠다. 처음부터 거장의 솜씨를 요구하는 것은 비겁한 평이다. 질문은 계속해서 던져져야 한다. 훗날 작가가 다른 책에서 들고 나올 더 날카로워진 질문들과 나름의 해답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