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과 추상-연구-애니메이션

by Yongmoon Kim

취미라기에는 매우 불성실하고 얄팍하지만 나는 그림을 좋아한다. 처음에는 대체로 ‘점만 찍어놓은 현대미술’이 무언가 있는 것 같아서 젠체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 왜 표현이 저렇게까지 변화하였는지 궁금해서 미술사를 위주로 공부한 적이 있다.


회화를 굉장히 단순화해 구분하면 구상화와 추상화로 나눠볼 수 있는데, 나는 항상 구상화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물론 단순 재현보다는 현실에 표현에 대한 고민이 보이는 그림들이 좋다. 피카소, 마티스 이런 작가들의 시대에 그림이 대표적이다.


일단 구상화는 시각적 쾌감이 있다. SNS에서 흔히 말하는 ‘감성이 있다’라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소비의 차원이니까. 여기서 말하는 쾌감은 추상에서 오는 불가지성보다, 구상화가 주는 현실에 기반한 안정성과 쾌감이 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구상화는 어쨌든 그림이 현실에 뿌리 박고 있기 때문에 항상 대화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 좋다. 작가와 내가 됐건, 나와 다른 감상자가 됐건 언제나 대화를 할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이 있다. 정말 좋은 구상화들은 현실에 대한 애정과 치열한 관찰에 기반하고 있고, 거기에서 표현하고 싶은 바에 대한 고민과 수정이 이어진다.


추상화라고 해서 모든 그림이 이런 과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추상화는 자기 내면에 대한 침잠인 것 같고, 그렇기에 대화의 여지가 적으며 어떨 때는 오만함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세상과 대화하지 않으면 나의 메세지가 어디쯤 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물론 예술은 학술적 글쓰기와 같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진리를 근거를 통해 주장하고 이를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검증하는 영역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표현의 영역이다. 하지만 표현이라고 해서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있고, 현실에 대해 무관심하게 남아있는 그림을 보고 내가 좋은 평가를 줄 이유도 없다. 해서 대체로 그리 뛰어난 표현법과 메세지를 담고 있지 않은 추상을 보면 ‘그건 니 생각이고’ 라는 생각이 먼저 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사진도 좋아한다. 사진은 현실에 강하게 묶여있어서 표현이라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치열한 관찰과 애정이 보이는 사진들이 있다.


사실 사회과학에서의 연구도 좋은 구상화와 같아야 한다. 현실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이를 충분히 설명해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 내지는 사회과학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연구들이 더러 현실을 내 식으로 해석하는데에만 치중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혹은 현실의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에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탐구하는 연구들도 있다. 전자는 내면에만 침잠하는 추상화와 같고, 후자는 단순 재현만을 반복하는 구상화나 사진과 같다. 연구 대상이 결국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진짜 과학자라면 현실에 대한 아주 면밀한 관찰을 통해 질문을 발견하고, 근거를 통해 이를 질서정연하게 이해하고 설명해야 한다. 특히 사회 과학에서는 현실의 어느 부분을 보여줄지는 순전히 과학자의 흥미에 달려있다. 이런 측면에서 사회학 연구자가 정리해내는 이론은 미술가가 그려내는 구상화와 같다.


애니메이터로서 미야자키 하야오를 좋아하고 또 존경한다. 영화 얘기가 나오면 항상 ‘모노노케 히메’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가 최고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기 바쁘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 내용과 그림의 표현, 영상화 모두 현실에 대한 집요한 관찰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존경스럽다.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또 너무 길어지니까 접어두자.)


끝으로 언제나 모범으로 삼을만한 그의 일문.



“이런 건 말야 실제로 어린애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야. 그런 관찰 못하면 못 그리지. 이걸 안하고 아무것도 못 보고, 자기 자아밖에는 관심이 없고 그런 일상생활만 보내고 있고. 인간관찰을 싫어하는 인간이 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오타쿠 소굴이 되는 거지. ... 난 정열도 인생 경험도 없는 오타쿠를 고용할 생각은 없다. 불을 표현하려면 불을 접하지 않으면 안된다. 누군가의 작품을 따라 만들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앞으로의 애니메이션은 맡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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