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가다보면 무언가 깨달음을 줄 요량으로 ‘너는 왜 사니?’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그냥 사니까 살죠’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그렇게 대답을 하면 마치 아무런 의미 없이 세상을 사는 것 처럼 보일까봐 주저하게 된다. 하지만 그게 잘못일까? 잘잘못을 떠나서 실천적(practice)으로 그런 행위가 존재하지 않나?
‘왜 사니?’ 라는 질문 뒤에는 흔히 삶의 이유를 명확히 하고 그것을 따라가라는 가정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런 방식의 삶 또는 행위가 불안정성을 없에주고, 실천적으로도 이런 행위가 존재한다. 즉 명확히 목적을 그리고 거기에 따라 수단을 찾아 그대로 수행하는 방식의 이른바 ‘합리적 행위’는 실천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이것이 인간 행위의 ‘전부’는 아니다. 다시 말해 ‘그냥 사니까 살죠’라는 말이 실천적으로 잘못된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를 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행위하고 있나?
Joas (1996, ‘The creativity of action’)는 여기에 대해 매우 재밌는 예시를 내놓는다. 행위의 육체성을 설명하면서 Joas는 ‘의미있는 목적성의 상실(meaningful loss of intentionality)’ 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속한 상황(situation)이나 감정이 매우 모호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때, 우리는 의도적으로 합리적으로 행위하는 것을 놓아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즉 상황에 맞는 목적과 수단을 설정하지 않고, 그저 상황이 흘러가는대로 우리를 내맡기는 것이다.
Joas는 ‘의미있는 목적의 상실’을 통해 그저 몸이 상황에 반응하는대로 웃거나 우는 행위를 예시로 든다. 그러나 ‘의미있는 목적의 상실’이 꼭 행위를 온전히 육체에 내맡기는 것만 있지는 않을 것 같다. 가령 우리도 뭘 어찌해야할지 모를 때, 삶이나 행위에 대해 어떤 의미나 목적, 가치를 가져야할 지 모를 때 그저 주어진 상황에 내맡기면서 이를 찾아가는 경우가 있다. 더 나아가 이 과정을 거쳐 하나의 목적이나 의미(행위성)을 얻더라도, 우리는 행위하는 중에 목적과 수단은 부단히 변화해간다.
이와 같이 Joas의 논의를 받아들이면 오히려 의미와 목적을 명확히 그리며 사는 삶이 더 신기하게 느껴진다. 그런 모습이 여러 모습들 중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는 ‘너는 왜 사니, 아무 목적없이 사는 것이라면 좀 더 의미를 찾거라’ 라는 조언은 약간은 오만한 조언이기도 하다. 사람은 행위의 의미나 목적을 찾기 위해 다양한 곳을 바라봐야할 뿐 더러, 많은 경우는 의미를 찾기 위해 ‘그냥 살’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행위하는 와중에서 행위성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사람에 대한 좁은 이해로는, 좁은 수준의 조언밖에 할 수 없다. 실천적으로도 본인의 머릿 속에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현실에 걸려 넘어지기 마련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그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러한 ‘합리성’과 합리적 모델의 맹신에 대한 비판을 보여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