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물거리는 아이를 다그치고 난 뒤, 아이가 건네온 화해의 손길은 뜻밖에도 내 삶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질문이 되어 돌아왔다.
“엄마,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안아줘.”
아이는 화가 난 나를 달래려 먼저 애착의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그 따스한 손을 잡는 대신, 정답지 같은 차가운 훈계를 선택했다.
“엄마는 네가 안아주는 것보다, 네 할 일을 다 했을 때 마음이 풀려.
엄마 마음은 달래주지 않아도 되니까 어서 하던 일 마무리해.”
싸늘해진 공기를 수습해 보려 서둘러 다정한 말을 덧붙였다.
“엄마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어.
네가 할 일 하는 모습만 보여주면 엄마 화는 금방 풀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화 풀고 얼른 해.”
사랑이라는 불변의 명제로 아이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냉정한 효율성과 서투른 위로 앞에 멈춰 선 아이는, 나지막하지만 날카로운 진실을 던졌다.
“나는 그렇게 화가 빨리 풀리지는 않아. 엄마도 할머니한테 혼났을 때, 바로 화가 풀리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그 말은 ‘오늘의 과업’을 향해 질주하던 나를 단번에 멈춰 세웠다.
나는 화해조차 서둘러 끝내려 하고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바쁘고, 기다리지 못할까.
사실 서두르듯 화해를 해치우는 습관은 이미 다른 관계에서도 반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복의 끝에, 끝내 풀리지 않은 매듭으로 남은 사람이 있다. 바로 나의 언니다.
우리는 성향이 아주 비슷했다. 눈앞에 닥친 문제를 기어코 효율적으로 해결해내고야 마는 수리공 기질을 똑같이 타고난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는 그 능력이 유능함으로 빛났다. 언니는 의사로 환자를 살리기 위해 온 힘을 쏟았고, 나는 위기의 순간을 되살리는 마케터로 일했다.
하지만 그 유능한 시선을 서로에게 들이댔다는 점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언니는 나를, 나는 언니를 고쳐야 할 결함투성이로 바라보며 늘 못마땅해했다. 게다가 ‘언니’라는 서열까지 더해지자, 나는 내 마음을 설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미안해”, “이제 괜찮아” 같은 말로 상황을 서둘러 봉합해야 했다.
우리 둘 다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지만, 관계 안에서는 늘 언니의 속도만이 정답이 되었고,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내 감정은 번번이 틀린 것이 되었다.
가깝기 때문에 빨리 매듭짓고 싶었고, 소중하기 때문에 당장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조급함 속에서 관계의 핵심인 ‘기다림’은 속절없이 생략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마음이 풀릴 시간을 주지 않는 화해를 반복하며 서서히 멀어졌다.
나의 화해는 결국 ‘회피’로 일단락되었다.
나는 언니와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었고, 싸울 일은 줄어들었지만, 그것은 해결이 아니라 외면에 가까웠다.
나는 이 관계에서 배워야 할 것들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빠져나와 버렸다.
상처 입은 채 달라진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도,
화해란 아무 일도 없었던 예전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그리고 상대가 나를 미워하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그 사람의 몫으로 남겨둘 수 있는 단단함도,
내 안에는 여전히 자리 잡지 못했다.
결국 나는 관계의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멈춰 선 채, 미숙한 어른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 미숙함은 아이에게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토록 밀어내고 싶었던 언니의 단호함을, 어느덧 나는 아이에게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아이의 나지막한 대답은 나를 향한 공격도, 고집도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의 마음이 풀리는 속도가 다르니 그 ‘감정의 시차’를 인정해달라는 지극히 건강한 신호였다. 아이는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마음이란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금세 정리되는 기계가 아니라, 오직 자기만의 속도로 흘러가야 비로소 정화된다는 것을. 언니와의 관계에서는 끝내 배우지 못했던 이 귀한 진실을, 나는 오늘 아이를 통해 배운다.
나는 정말 변하고 싶다. 아니, 반드시 변해야만 한다.
평생 '고장 난 건 당장 고쳐야 맛'이라 믿어온 수리공에게, 사실 '기다림'은 다루기 가장 까다로운 부품이자 생소한 설계도다. 일단 달리고 보는 성미라 그런지, 이제는 '잘 쉬는 법'조차 따로 연마해야 할 기술처럼 느껴진다. "그래, 마음만 먹으면 이것 하나 못 해내겠어?" 하는 묘한 오기까지 생기는 걸 보면 말이다.
나는 이제 아이 앞에서만큼은 기꺼이 ‘기다림에 유능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누구보다 빨리 문제를 해결하던 그 동력을, 이제는 누구보다 끈질기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견디는 것'에 쏟아부으려 한다. 아이가 내 화해의 손을 단칼에 거절하더라도, “지금 네 기분은 당연한 거야”라고 말하며 태연하게 버티는 고도의 인내심을 발휘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언니에게 간절히 바랐으나 끝내 받지 못했던 구원이자, 이제는 내가 아이에게, 나아가 내 안의 웅크린 어린 나에게 건네야 할 가장 진실한 화해이기 때문이다.
설명되지 않는 화도, 쉽게 풀리지 않는 마음도 억지로 수리하려 들지 않고 그저 지켜볼 것이다.
어른의 눈에는 비효율적인 정체로 보일지라도, 그 시간은 아이가 자기 마음을 정직하게 통과하는 성장의 과정임을 믿는다. 불편한 공기를 묵묵히 견디는 일 자체가 때로는 관계를 지키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임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때로는 아이의 시야에서 살짝 벗어나 가만히 집안일을 하며 아이에게 숨통 트일 자리를 내어준다. 내 존재가 압박이 되지 않도록, 그러나 결코 혼자는 아니라는 온기가 느껴지는 거리에서 나는 아이의 시간을 묵묵히 수호한다.
감정의 파도가 잦아들 무렵, 나는 남은 과업들을 퇴근한 남편의 손에 조용히 넘긴다. 리딩트리 두 권과 줄넘기 500개. 내가 붙잡고 있었다면 숫자를 채우느라 또 한 번 서로의 마음을 갉아먹었을 일들이다. 남편은 아마 영어책 한 권쯤은 너스레를 떨며 건너뛸 것이고, 줄넘기 횟수는 아이의 실제 개수보다 빠르게 카운팅하며 아이를 능청스럽게 다독일 것이다. 그 느슨하고 유연한 틈이 지금 우리에겐 절실하다는 것을 믿기에, 나는 수영장 물속으로 들어가 비로소 나의 조급함을 씻어낸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관계를 되살리는’ 역설적인 마케팅을 시작한다.
아이의 슬픔이 제 발로 걸어 나갈 때까지 그저 곁을 지키는 것. 결함을 찾아내 고치는 수리공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무너진 마음이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고요히 자리를 내어주는 일은 오직 ‘엄마’만이 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일임을 나는 믿는다.
“제발 그냥 좀 있어 보라”던 남편의 말은 늘 옳았다.
오늘, 나는 그 무겁고 거룩한 침묵의 가치를 조용히 실천해 본다.
수리공의 자존심을 걸고 난 기다림1등을 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