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친절한 스승

by 브라이트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수영장을 다녀오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는 사실을.

물속에 몸을 담그기 전까지 나를 짓누르던 부정적인 기운들은 물살을 가를 때마다 하나둘씩 허물을 벗듯 떨어져 나갔다. 몸을 한껏 몰아붙인 뒤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팽팽하게 긴장해 있던 마음은 어느새 느슨하고 너그러워졌다. 나에게 수영은 오늘의 무게를 덜어내는 ‘가벼워짐의 의식’이었다.


시작은 호기로웠다. 새벽 5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등록한 기초반.

하지만 3개월 뒤, 나는 차가운 현실 앞에 '못하는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몸은 허우적거렸고, 6개월 차 나의 수영은 나쁜 습관들의 집합체였다.

앞서가는 동기들과 상급반의 우아한 스트로크를 보며 나는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그때 내 안의 스승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야, 아침부터 물속에 들어가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그것부터 이미 넌 합격이야. 지금 좀 허우적대면 어때. 남들보다 몸이 물이랑 낯가림을 좀 심하게 하는 것뿐인데. 상급반 사람들도 처음엔 다 너처럼 물 먹으면서 시작했어. '못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선 긋지 마. 폼 좀 엉성하면 어떠냐, 네가 지금 물속에서 버티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야, 너 은근 욕심많다. 남들 속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오늘 네 팔 한 번 제대로 젓는 거에만 집중해 봐. 기죽지 마, 너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 다정한 응원 덕분이었을까. 암흑 같은 정체기 속에서 귀한 깨달음을 얻었다.

동작을 완수하지 못한 건 이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버텨낼 ‘기초 체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남들보다 더 채워야 할 체력이라는 빈 주머니가 하나 더 있었던 셈이다.

나의 상태를 인정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거봐, 네가 못해서 안 되는 게 아니라니까. 몸이 그 동작을 기억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한 것뿐이야. 지금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아도, 사실은 비어 있는 네 체력 주머니를 꽉꽉 채우는 중이거든. 그게 어느 정도 차올라야 몸이 단단해지면서 쑥 나아갈 수 있어. 그러니까 조급해하지 마. 지금 아주 잘 가고 있어. 얼마 전까지 어땠어? 한 바퀴 돌고 오면 헉헉거리고 얼굴 완전 벌게지고 했는데 지금 어때? 너 두 바퀴 돌잖아. 그거 엄청난 발전이야."


나는 강습을 잠시 멈추고 주 5회 자유 수영을 택했다.

타인의 속도가 아닌, 오로지 나의 목표에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2년 6개월이 지났을 무렵, 마침내 변화가 찾아왔다.

버둥거림이 멈춘 자리에 물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글라이딩’의 감각이 찾아온 것이다.

서두르지 않으면 가라앉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사라진 자리에는 깊은 감동이 차올랐다.


"거봐, 괜히 버틴 게 아니지.

요즘은 물이 너를 밀어내는 게 아니라, 네가 물을 타고 가는 순간들이 보이더라.

그거면 충분해. 이제부터는 더 멀리 가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거야."


우리가 무언가를 포기하는 이유는, 어쩌면 스스로를 너무 빨리 포기시키는 쪽에 가까운 사람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배움의 방식을 다시 보게 되었다.

즐겁게 무언가를 배우는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니,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배움을 단순한 '연습'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는 '과정'으로 여기고 있었다.


피아노에 빠진 내 친구는 실수를 줄이려 곡을 통째로 외우고, 샤워 시간조차 자신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선물 같은 시간으로 채웠다고 했다. 우리 아들 역시 수영을 경직된 연습이 아닌 ‘물과 친해지는 놀이’로 받아들였기에 누구보다 빠르게 나아갈 수 있었다.


"배움은 직선이 아니라 입체야. 괴로운 연습만으로는 절대 못 가는 지점이 있지.

물속에서 구르고, 음악을 선물처럼 듣는 그 '노는 마음'들이 모여서 너만의 단단한 근육이 되는 거야.

결국 오래 가는 건, 버틴 사람이 아니라 즐긴 사람이야."


이제 나는 실력이 늘지 않는 정체기가 찾아와도 당황하지 않는다.

변화가 보이지 않는 시간에도, 몸은 조용히 방향을 바꾸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답답해할 거 없어. 지금은 네가 무너지지 않도록 바닥을 아주 단단하게 다지는 중이니까.

나는 네가 포기하지 않고 이 고요한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서 참 보기 좋다.

야, 너 진짜 멋있어."


“지금 네 몸은 이 동작을 버틸 힘이 조금 부족하니, 오늘은 이만큼만 해보자.” 안 되는 이유를 탓하기보다 조건을 바꿔주고, 몸이 이해할 시간을 충분히 기다려주는 법. 미세한 발전을 찾아서 칭찬해주고 그 기쁨을 느끼는 일. 난 누구보다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고, 나 자신의 기쁨을 위해 수영한다는 사실을 매일 깨닫는 일. 내가 나에게 보내는 이 다정한 말 한마디는 물속에서 나를 가라앉지 않게 하는 가장 강력한 부력이 된다.


"오늘은 손등이 앞을 보게 한 뒤에 옆구리 지퍼를 올리듯 팔꿈치를 먼저 들어 올려봐."

"마치 물속에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가슴을 열고 쑥 들어가 봐. 네 가슴이 깊게 내려가야 반작용으로 엉덩이가 올라오고, 그 탄력으로 네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가는 거야. 누르는 힘이 있어야 올라올 힘도 생기는 법이거든."


나는 물속에서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건다.
어제의 서툰 몸짓을 나무라는 대신, 오늘 손바닥에 묵직하게 걸리는 물의 무게를 기쁘게 맞이한다.

이건 단순한 혼잣말이 아니다. 메마른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조금씩 다시 채워가는 시간이다.

내 안의 스승이 물길을 열어주며 다정하게 속삭인다.


"자, 방금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간 그 시원한 물의 감각 느껴져? 그게 바로 네가 물을 제대로 밀어냈다는 증거야."

"어라, 너 오늘 호흡이 어제보다 훨씬 편안해졌는데? 그만큼 몸에 힘이 빠졌다는 뜻이지. 아주 좋아."

"자, 이제 봐봐. 네 몸이 물 위를 미끄러지듯 쓱 나아가고 있잖아. 이 조용한 전진, 정말 멋지지 않니?"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이 찰나의 미세한 기쁨들을 스승은 놓치지 않고 찾아내 준다.

“방금 그 동작, 정말 좋았어.”라고 조용히 이름 붙여주는 그 목소리에 나는 비로소 환하게 웃는다.


나는 나의 가장 다정한 스승이 되어 오늘도 기쁘게 수영을 배운다.

그렇게 물속에서 다독이며 길어 올린 긍정의 기운은 어느새 수영장 밖의 나를 단단히 받쳐 준다.

작은 진보에 마음을 내어주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는 시간.

나는 오늘도 물속에서 가장 나다운 기쁨을 건져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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