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엄마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윤! 너 언제까지 낚시 놀이만 할 거야? 수학 문제집 풀었어, 안 풀었어?"
"네 장 다 풀기 전엔 꼼짝도 하지 마!"
"네 장이나? 말도 안 돼! 난 못해, 절대 못해!"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빠는 분명 한 장만 해도 된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 아빠는 지금 집에 없다. 회사 워크숍 때문에 베트남에 가셨다.
오늘따라 내 편인 아빠가 너무너무 보고 싶다.
밤에 침대에 누웠을 때 아빠가 보고 싶어서 아빠 베개를 꼭 껴안았다.
베개에서 아빠 냄새가 사라질까 봐 덜컥 걱정이 되었다
며칠 뒤, 아빠 차가 주차되는 소리가 들리고 조금 있다 현관문이 '덜컥' 열리며 드디어 아빠가 돌아왔다.
나는 내 방에서 문소리를 듣고 달려 나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번에는 엄마가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다.
"윤아, 엄마 며칠 집 비울 거야.
이모가 수술을 해야 해서 엄마가 병원에 가서 간호해 줘야 해."
엄마는 현관문을 나서면서도 잔소리를 퍼부었다.
"아빠 말 잘 듣고! 문제집 꼼꼼히 풀고! 알았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가만히 아빠를 올려다봤다.
아빠도 아무 말 없이 나를 내려다봤다.
잠깐의 침묵 뒤, 우리 두 사람의 눈빛이 동시에 '반짝!' 하고 빛났다.
"아빠, 나 배고파. 근데 밥 말고 다른 거 먹고 싶어."
아빠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슬며시 웃었다.
"그래? 그럼 우리 마트 한번 털어 볼까?"
엄마가 있을 땐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마트 카트 안에는 육개장 사발면, 부대찌개 밀키트, 초밥, 과자 봉지, 초콜릿 우유가 차곡차곡 쌓였다.
"엄마가 알면 기절하겠지?"
"그러니까 이건 아빠랑 윤이, 남자들만의 비밀이야."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신나게 상을 폈다.
보글보글 끓는 부대찌개 냄비에서 김이 올라오고, 접시엔 쫄깃한 초밥이 놓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라면이 자리 잡았다.
라면이 오늘따라 유난히 꿀맛이었다.
그때였다. 따라라랑 따라라랑— 식탁 위에 놓인 아빠의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은 '내 사랑' 엄마였다.
나와 아빠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젓가락을 딱 멈췄다.
"어, 여보. 별일 없지? 처제 수술은 잘 됐어?"
아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시작했다.
"저녁? 아, 그럼~ 우리 아주 잘 챙겨 먹었지. 걱정하지 마."
아빠는 전화를 하면서도 슬쩍 나를 보며 눈을 찡긋 감았다.
나는 얼른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쉿!' 하고 신호를 보냈다.
전화기 너머로 엄마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를 끊자, 우리는 잠시 서로를 쳐다보더니 결국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배는 올챙이처럼 불룩해졌고, 입가에는 라면 국물이 살짝 묻어 있었다.
엄마랑 아빠랑 셋이 함께 있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아빠랑 둘만 있는 시간도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병원에서 이모를 아주 잘 돌봐주고…….
음, 아주 조금은 집에 늦게 와도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