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눈을 떴을 때 세상은 낯설게 흔들리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머리가 누워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굴러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머리 꼭대기에 태엽을 감아 놓은 인형처럼, 끼릭끼릭 소리를 내며 머릿속이 돌아갔다.
나는 이불 속에서 조용히 뒤척이며 작은 신음을 흘렸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엄마가 벌떡 일어났다.
“윤이야, 어디 아파?”
엄마의 손이 이마에 닿고 잠시 후 체온계가 귀에 들어갔다.
‘띠익.’ 엄마가 낮게 말했다. “어머… 39도네.”
말이 끝나자마자 엄마는 거실로 뛰어나갔다가 잠깐 뒤 약과 물컵을 들고 돌아왔다.
나는 반쯤 일으켜진 채 약을 삼켰다. 물 한 모금을 겨우 넘기고 다시 이불 속으로 쓰러졌다.
방 안의 고요함 속에서, 뜨거운 내 몸은 과열된 기계처럼 웅웅거리며 위태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머릿속엔 거대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고, 귓가엔 멎지 않는 거친 바람 소리가 휘몰아쳤다.
엄마는 찬 수건을 적셔 이마에 올렸다가 시간이 지나면 차가운 면으로 바꿔 양 볼을 닦아 주었다.
적셔 오고, 다시 적셔 오고, 또 적셔 오고. 손길이 몇 번이나 오갔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어느 순간 깊이 잠들어 버렸다.
“윤아야, 열 좀 재 보자.” 아침이었다. ‘띠익.’ “37.7도네. 많이 내렸네.”
나는 곧장 물었다. “엄마… 오늘 학교 못 가지? 그치?”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열 다 내렸는데 무슨 소리야. 얼른 일어나 씻어.”
순간 세상이 무너졌다. 밤새 고생했는데, 학교라니.
“아냐! 나 아직 아프단 말이야! 머리도 띵하고 몸도 무겁고… 진짜 못 가!”
엄마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알았어. 농담이야.”
그리고 이불을 다시 덮어 주며 말했다.
"엄마가 선생님께 오늘 아파서 하루 쉰다고 말씀드릴게.”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낮이 되자 열이 다시 치솟았고, 결국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선생님은 ‘독감 검사’를 선언했다. 길쭉한 면봉이 콧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으윽!” 눈물이 핑 돌았고, 의사선생님의 “씩씩하다”는 칭찬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과는 역시 독감이었다.
곧 엉덩이 주사를 맞았다. 작은 침대 끝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주사가 들어가는 순간 ‘윽!’ 하고 소리가 튀어나왔다. 너무 아파서 정말 다시 맞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팔에 수액 바늘이 꽂혔다. 이번엔 아픔보다 지루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멍하니 약병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엄마가 머리칼을 넘기며 속삭였다. “조금만 참아, 다 됐다.”
아침까지만 해도 빈 껍데기처럼 움직였는데, 이제는 몸 안에 조금씩 힘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신기한 건 몸의 회복만이 아니었다. 독감 확진과 동시에 집안 공기가 180도 바뀌었다.
독감에는 이상한 마력이 있다. 평소 엄격하던 엄마를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다정한 ‘순한 양’으로 변하게 만든다는 거다. 엄마의 말투는 세상 모든 모음을 엿가락처럼 길게 늘린 듯 부드러워졌다.
“우리 윤이~ 배고프지?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입맛이 없어 도저히 밥은 못 먹겠다고 슬쩍 밑밥을 던지면, 엄마는 간절한 눈빛으로 다시 묻는다.
“그럼... 라면은? 라면은 좀 먹을 수 있겠어? 진라면 순한맛 끓여줄까?”
“어. 진라면이라면 조금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 덕분에 나는 이틀 연속 라면을 먹는 영광을 누렸다.
사실 진짜로 아플 때는 내 몸속에서 태풍이 몰아치고 있는 것 같아, 그 매콤하고 짭짤한 라면 말고는 딱히 당기는 것도 없었다.
최고의 혜택은 따로 있다. 바로 ‘컴퓨터 자유 이용권’.
침대에 누워 심심해질 때 살짝 엄마 눈치를 보며 물었다.
"엄마, 나 너무 심심한데… 컴퓨터로 과학 영상 봐도 돼?"
"어머, 그럼! 당연하지. 오래보면 머리아프니까 한 시간 보고 좀 쉬다가 또 보자."
숙제나 문제집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회복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엄마는 감격스러운 눈치였다.
이건 솔직히 독감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여전히 독감은 나쁘다. 수시로 머리가 띵하고 입맛을 잃어 먹고 싶은 게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약을 시간 맞춰 챙겨 먹는 것도, 기운 없는 몸으로 하루 종일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지내야 하는 것도 답답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나를 위해 끊임없이 먹고 싶은 것을 묻고, 내려간 이불을 끌어올려 주고, 뜨거운 물주머니를 배에 얹어주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몽글몽글해진다. 나를 괴롭히는 병이지만, 그 덕분에 누리는 이 특별한 대접들에 자꾸만 입꼬리가 실룩거린다.
이제는 정말 다 나아가는 모양이다. 자꾸만 먹고 싶은 것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두툼한 패티가 들어간 햄버거도 먹고 싶고, 소스가 꾸덕하고 느끼한 까르보나라도, 입안에서 살살 녹는 고소한 연어초밥도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