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하자마자 평화롭던 일상은 다시 '속도전'이 되었습니다.
“빨리빨리 해.” “딴짓하지 말고 그것부터 끝내.”
나도 모르게 날 선 말들이 툭툭 튀어나옵니다.
방학 때는 여유롭게 즐기던 모든 일들이, 이제는 얼른 해치워야 할 숙제처럼 변해버렸습니다.
벽 위의 시계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움직이지만, 그때마다 우리에게 남은 오후가 조금씩 깎여 나갑니다.
수영 가기 전까지 끝내지 못한 숙제, 그리고 이어질 독서록과 피아노의 행렬.
여유를 가지려 애써보지만 아이의 느릿한 몸짓 앞에서 ‘기다려야지’ 했던 다짐은 금세 허물어집니다.
“만화책 그만보고, 거실로 나와서 수학 문제집 풀어야 한다고 몇 번을 말했니!”
결국 기다려주지 못한 채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삼시 세끼 차려내느라 “도대체 개학은 언제 하나” 손꼽아 기다렸는데, 막상 학교에 가니 아이를 닦달하는 내 모습만 남았습니다. 만화책을 펼쳐 놓고 아무 데나 뒹굴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던 방학 오후가 자꾸 떠오릅니다. 오늘도 숙제 앞에서 아이와 한바탕 대치하고는 “엄마가 화내는 건 네가 여러 번 말해도 안 해서잖아!”
하고 쏘아붙인 뒤, 씁쓸한 후회를 삼켰습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일 년에 화를 한두 번만 낸다는 장항준 감독의 삶은 정말 가능한 걸까? 나에게는 늘 화를 낼 정당한 이유가 있었고, 화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를 닮고 싶어 비결을 찾아보니, 그는 성인군자라서가 아니라 한 가지 진리를 받아들였더군요.
‘세상은 내 의지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즐거운 일에 집중하는 것.
저도 그 마음을 일상에 대입해 보기로 했습니다.
무언가에 푹 빠져 있는 아이의 기분이나 속도를 내 의지대로 완벽히 조절할 수 없음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금요일 오후라면 과감히 여유를 주고, 해야 할 일이 세 개라면 하나로 줄이는 결단도 내립니다.
"윤아, 낚시 놀이가 그렇게 재미있니?"
"응. 주말에 배스 보팅 가잖아. 그거 연습하는 중이야. 이번엔 꼭 한 마리 잡고 싶거든."
아이의 세계는 생각보다 진지하고, 생각보다 소중합니다.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보기로 합니다.
조급함을 내려놓은 자리에 유머를 채워봅니다. 아이를 다그치는 대신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왜 일기 쓰는 데 한 시간이 걸리는지, 수학 문제집 앞에서 왜 한숨부터 쉬는지 물었습니다.
"우리 윤이, 4학년이 너무 좋아서 1년 더 다니고 싶은가 보네."
"아니, 왜?"
"네가 숙제를 안 하잖아."
웃음 섞인 농담 끝에 진심을 물었습니다.
"윤아, 수학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시간이 걸리는 거야?"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습니다.
"아니, 그냥 양이 너무 많아서 하기가 싫어." 우리는 곧장 타협점을 찾았습니다.
"그럼 한 번에 해야 할 양을 조금 줄여볼까?" 아이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습니다.
"응! 그러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이가 숙제하는 동안, 저는 감시자가 아닌 '동료'가 되기로 했습니다.
1분 1초를 체크하며 "왜 안 해?"라고 묻는 대신, 아이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저는 옆에서 제 글을 씁니다. 숙제가 끝나면 함께 즐길 '보상'도 준비합니다.
"오늘 숙제 다 하면 소고기 구워서 데리야키 소스 바르고 토치로 불 맛 내줄게. 진짜 맛있겠지? 먹고 싶으면 얼른 해보자!"
완벽한 부모는 아니어도 노력하는 부모이고 싶습니다.
결과는 내려놓되, 함께 나아가는 ‘시스템’은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세수하듯 그냥 하는 것. 기분이 좋다고 하고, 나쁘다고 안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묵묵히 해내는 힘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기분과 상관없이 해야 할 일을 해낼 때, 사람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거야."
아빠는 회사에 가고, 엄마는 집을 돌보고, 아이는 숙제를 합니다.
이 평범하고 정직한 반복이 언젠가 우리 가족을 가장 안전하고 단단한 목적지로 데려다줄 것이라 믿으며, 우리는 오늘도 '그냥'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