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새 학기 반 배정 결과를 보고 실망이 컸다. 꼭 같은 반이 되고 싶었던 우주와 떨어졌기 때문이다. 교실 문 앞에서 반 배정 종이를 다시 한번 확인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우주는 말투가 부드럽고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지 않는 참 괜찮은 친구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음이 절로 편안해진다. 옆에 서 있기만 해도 괜히 마음이 차분해지는 그런 친구다.
우리는 운동을 좋아한다는 공통점 덕분에 꽤 잘 맞았다. 우주는 축구파고 나는 ‘운동장파’라는 차이는 있지만, 운동장에서 같이 뛰어다니며 노는 게 정말 즐거웠다. 점심을 입안 가득 밀어 넣고 나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운동장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그네에서 누가 더 꽈배기를 잘 만드는지 겨루기도 하고, 누가 더 멀리 뛰는지도 내기했다.
게다가 우주는 헤어스타일도 늘 깔끔하고 세련돼서 꽤 멋져 보인다. 바람이 불어도 머리가 금방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무엇보다 내가 우리 반에 요요를 유행시켰을 때, 유일하게 ‘강제 리턴’을 성공시킨 실력자였다. 내가 좋아하는 걸 함께하다 보니 우리는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한창 우주랑 노는 게 신날 무렵, 우주가 미국 영어 캠프를 간다며 방학 한 달 전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운동장에서 괜히 한쪽이 비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미국은 영어 공부를 하러 가는 곳이 아니라 낚시를 하러 가야 하는 곳인데!
우리나라에는 큰 물고기가 별로 없지만, 텍사스에 가면 어마어마한 사이즈의 물고기가 많다고 한다. 사람 팔만 한 물고기도 잡힌다고 들었다.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나도 우주처럼 방학 때 미국에 가고 싶다. 영어 공부 말고, 낚시하러.
우리 반에는 처음 보는 얼굴도 몇 명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범규다.
옆 동네 학교에서 전학 온 범규는 우리 ‘운동장파’의 파쿠르 놀이에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운동장을 한 번 둘러보더니 바로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당시 우리는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 중간쯤부터 난간 위로만 중심을 잡으며 내려오는 스킬을 연습하고 있었다.
범규 차례가 되었을 때였다.
놀랍게도 녀석은 단번에 성공해 버렸다. 마치 전에 해 본 사람처럼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운동을 좋아하면 친구가 되기는 쉽다.
“야, 범규! 너 아까 난간 타는 거 보니까 거의 서커스 수준이더라?”
내 감탄 섞인 말에 범규가 씩 웃었다.
“너도 만만치 않더라. 너 내일 수업 끝나고 시간 돼?”
“당연하지. 내일 제대로 한 판 더 하자.”
우리는 내일 도전해 볼 새로운 파쿠르 코스를 짜며 금세 의기투합했다.
구름사다리 두 칸씩 건너기,
바닥으로 착지 점프,
미끄럼틀 역주행,
난간 타고 내려오기,
그리고 마지막은 그네 멀리뛰기.
그야말로 '환상의 코스'다. 생각만 해도 벌써 몸이 근질거렸다.
내일은 초시계로 기록까지 재서 누가 가장 빠른지 진정한 승부를 가려볼 생각이다.
파쿠르의 유일한 단점은 놀다 보면 팬티 속까지 모래가 서걱거린다는 거다. 왜 거기까지 모래가 들어가는지는 미스터리지만 말이다.
가끔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친구도 한 명 있다. 바로 김연우다.
연우는 매번 새로운 장난감을 학교에 가져온다. 수업 시간에는 절대 꺼내지 않다가 운동장에서만 슬며시 자랑한다.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운동장을 서성이는 연우 곁으로 슬금슬금 모여들기 시작한다.
지난번에는 게임에 나오는 단검을 가져왔다. 손가락으로 휙휙 돌리며 나뭇가지를 자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칼 모양이 고양이 발톱처럼 꽤 날카로워 보여 조금 위험해 보였지만 플라스틱 재질이라 나뭇가지가 잘리지는 않았다.
마인크래프트를 즐기는 나로서는 꽤 익숙한 무기였다. 하지만 내 게임 월드에서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아이템이라 더 눈길이 갔다.
엄마한테 사달라고 하면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하다. 그래서 연우 것을 구경하고 한 번 만져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다음엔 또 어떤 신기한 걸 가져올지 은근히 기대된다.
학기 초의 최대 사건인 회장 선거도 무사히 끝났다.
오늘 우리 반에서는 치열한 경합 끝에 다민이가 1표 차이로 반장이 되었다. 마지막 표를 셀 때 교실이 아주 조용해졌다.
다민이는 스타일이 꽤 ‘힙’하다. 아이돌 노래를 부르며 춤추는 걸 좋아한다. 쉬는 시간에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하면 주변에 여자 애들이 금방 모인다. 우리 남자애들은 관심 없는 척 그저 힐끔 쳐다볼 뿐이다.
얼마 전에는 파마를 하고 왔는데, 내 눈에는 예전 생머리가 훨씬 나아 보여서 조금 아쉬웠다. 사실 나는 그 모습의 다민이를 살짝 좋아했었다.
다민이는 공부도 정말 잘한다. 선생님이 물어보시는 것 중 모르는 게 거의 없다.
엄마에게 “다민이는 모르는 게 없어.”라고 했더니, 엄마는 다민이가 무슨 공부를 하는지 알아봐 줄 테니 너도 그렇게 해 보겠냐고 물으셨다.
하지만 나는 다민이가 학원을 얼마나 많이 다니는지 이미 알고 있다.
수영을 같이 다닐 때도 다민이는 늘 10분씩 늦게 왔다.
“야, 좀 일찍 와서 같이 놀다가 강습받자!”
내가 말하면 다민이는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야, 나도 구몬수업 끝나자마자 달려온 거야.”
학원이 끝나면 또 다음 학원으로 달려가는 삶이라니. 나는 절대 그렇게 못 한다. 엄마가 시키셔도 싫다고 할 거다.
미국에는 낚시를 하러 가야 한다.
수업이 끝나면 또 다른 학원으로 가는 게 아니라 놀아야 한다.
그게 내 원칙이다.
내일도 범규랑 약속한 파쿠르 코스를 연습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이번에는 난간에서 더 멀리 뛰어볼 생각이다.
새 친구도 생겼고, 새로운 코스도 생겼다.
우리 운동장파의 새 학기가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