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파도를 보며 잠깐 망설인다.
뒤로 물러설까, 아니면 이 파도에 몸을 실어볼까.
모험가가 되는 순간은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다.
아주 잠깐, “한 번 가볼까” 하고 마음이 움직이는 찰나.
조금 낯설어도 괜찮다고, 아직 가보지 않은 쪽으로 몸을 기울여 보는 그 짧은 순간이 우리를 모험가로 만든다.
돌이켜 보면 모험은 꼭 거친 바다나 험한 산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생각을 붙잡아 보는 일,
아이의 말 한마디 속에 담긴 결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
오늘 하루의 기쁨과 짜증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천천히 되짚어 보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들어가 낯선 감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
돌이켜보니 감정에 휩쓸린 적은 많아도, 그 파도를 끝내 타고 넘었다는 정서적 성취감을 느껴본 기억은 별로 없다.
대부분은 “별일 아니야” 하고 넘기거나,
꾹 눌러 참다가 “아, 됐어. 말 시키지 마.” 하며 감정 뒤로 숨어버렸던 것 같다.
한 번은 청소하느라 진이 빠져, 정작 참치마요 김밥을 만들어달라던 아이와의 약속을 어기게 된 날이 있었다.
살림을 내려놓고 나서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많은 일을 해냈는데 마음은 왜 이리 무거운지.
정작 중요한 건 놓치고 엉뚱한 곳에 에너지를 쏟은 나 자신이 서글펐다.
남편의 부탁을 잊었던 날도 비슷했다. 며칠 전 바지를 줄여달라던 그의 기대를 저버린 채, 진행 상황을 묻는 남편에게 나는 미안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까맣게 잊고 있었어.”
당연히 서운해하거나 화를 낼 줄 알았던 남편은 오히려 내게 물었다.
“요즘 고민 있어? 처형이랑 싸웠어?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
비난 대신 돌아온 걱정은 날카롭게 서 있던 내 마음을 단번에 녹였다.
만약 그날 남편이 “종일 뭐 했느냐”며 비난을 쏟아냈다면 어땠을까.
나는 “나라고 안 바쁜 줄 알아?” 하며 날 선 방어기제를 세워 폭발하거나,
‘왜 이런 사소한 일조차 제때 못 할까’라며 깊은 절망의 굴 속으로 숨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배려 섞인 응시 덕분에 나는 스스로를 책망하는 대신,
내 안의 요동치는 파도를 가만히 지켜볼 수 있었다.
못난 모습까지도 있는 그대로 마주해 본 날, 나는 비로소 파도를 타고 넘는 법을 배웠다.
잘 해낸 날이 아니라, 잘하지 못한 날에도 그대로 머물 수 있는 자리가 사람을 얼마나 편안하게 만드는지 그날 깨달았다.
아이에게도 마음 편히 머물 자리가 필요하다.
칭찬받을 때뿐만 아니라, 실수한 날에도 자신의 자리가 여전히 안전하다는 안심 말이다.
문득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아이를 안심시키는 존재인가, 아니면 아이에게 안심을 요구하는 존재인가?”
요즘 우리 아이는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놓이면 독특한 반응을 보인다.
숙제를 하기로 약속해 놓고 연필만 만지작거리다, 결국 시작도 못한 채 나를 마주하는 순간 같은 때 말이다.
“뭐야, 아직 시작도 안 했네. 오늘 놀 시간이 있을까?” 나도 모르게 다그치면,
아이는 갑자기 “엄마 너무 좋아”라며 뜬금없는 고백을 하거나
“내가 엄마 속상하게 했지? 미안해” 하며 슬쩍 품에 안긴다.
그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나의 화는 눈 녹듯 누그러진다.
아이의 고백은 아마 이런 뜻이었을 것이다.
“엄마, 잠깐만 진정해 봐. 화내지 마. 나 이제 곧 할게.”
그리고 속으로는 이런 말을 삼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엄마, 사실 나 조금 피곤해. 잠깐만 쉬었다가 하고 싶어.”
어쩌면 아이는 자신의 파도를 넘는 법보다, 엄마의 파도를 먼저 잠재우는 법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엄마를 안심시키려 진짜 감정을 숨기고, 엄마는 아이를 달래려 가짜 웃음을 연기한다.
결국 우리 둘 다 웃는 얼굴 뒤에 진짜 마음을 꽁꽁 숨겨두는 법만 연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제는 아이가 알았으면 좋겠다.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억지로 누르지 않고 가만히 마주해도 된다는 것을.
두근거리는 불안과 억울함,
때로는 쏟아내고 싶은 분노까지도 그저 오롯이 느껴봐도 괜찮다는 것을 말이다..
나 또한 다짐한다.
잘했을 때나 잘못했을 때나, 아이가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는 변함없이 편안한 존재가 되어주기로.
그날 이후 나는 조금 다른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스스로 이름 붙인 ‘전략적 무시’, 그것은 완벽한 주부가 되려고 애쓰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칭찬받고 싶은 욕구와 잘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나만의 시간을 위해 과감히 포기할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엄마표 반찬 대신 반찬을 사 오는 날도 있고, 마당의 잡초를 애써 외면한다. 이불 빨래는 날씨 핑계를 대며 미룬다. 일상을 굴러가게 하는 최소한의 시스템만 남겨두고, 그 틈에서 생긴 시간을 나에게 돌려준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다시 모험가가 된다.
아무 목적 없이 생각을 따라가 보거나 떠오르는 이야기를 적는다. 무뎌졌던 감각이 조금씩 깨어나는 시간이다. 내가 여유를 되찾자 아이를 향한 질문도 달라졌다.
“재밌었니?”, “맛있었니?”처럼 ‘좋았어’라는 대답이 정해진 질문은 하지 않는다. 대신 진짜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너희 반에 급식 흑기사 있니? 엄마 때는 우유 귀신들이 있었거든.”
“엄마, 내가 바로 흑기사야! 오늘 초코빵을 두 개나 먹었어!”
나는 이제 아이가 '매우 잘함'을 받았을 때보다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낼 때 더 안심이 된다.
아이의 일기장에는 시험 성적보다 소중한 감정의 흔적들이 빼곡하다.
"나는 뭔가 다른 사람에 대해 예민한 타입이다.
그래서 사람 많은 데서 아이 혼자 있으면 다른 어른들이 나를 보고 이상하다라고 생각할 거라고 생각한다.”
"서준이가 스키를 혼자 잘 못 신어서 슬로프에서 한 참 있을 까봐 엄청 겁났다.”
“엄마가 화를 내는 이유는, 내가 너무 수학문제집을 느리게 풀기 때문이다. 내가 느리게 푸는 이유는 어려워서다. 하기 싫어서가 아니다.”
힘들다, 화가 난다, 부끄럽다.
하루가 이토록 다채로운 감정으로 물들어 있다면, 그 하루는 이미 충분히 모험을 한 날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진짜 모험은 새로운 장소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가짜 감정을 지나 진짜 감정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 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좋았어”라는 말만 듣는 엄마가 아니라
“무서웠어”, “화가 났어”, “속상했어” 같은 말들과도 기꺼이 마주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내 불안을 견디며 아이가 스스로 파도를 넘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일.
어쩌면 부모에게 필요한 진짜 모험은 바로 그런 일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