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지 말라는 말

by 규아

지수와 민정이는 여전히 단짝이었다. 민정이는 이곳에 처음 이사왔을 때 낯선 동네와 미문초등학교 아이들의 날 선 경계심을 홀로 견뎌야 했지만, 지수는 바람막이 같은 민정이가 있어서 그럴 일이 없었다.


지수가 앞서 걸으면 민정이는 자연스레 그 보폭에 맞췄다. 지수는 혼자 있는 것을 유독 견디지 못했다. "같이 가자, 응? 거기서 나 기다려주면 되잖아." 지수의 애처로운 부탁을 민정이는 매번 이기지 못했다. 피아노학원의 책들을 읽고 싶은 것보다는, 외동으로 자란 민정이에게, 누군가의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그 낯선 책임감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요한 균열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됐다. 지수의 피아노 실력이 늘지 않자 선생님의 꾸중이 이어졌고, 그 화살은 엉뚱하게도 민정이에게 향했다. "민정이 피아노 학원 따라다니지 말라고 하세요. 지수 말로는 민정이 때문에 집중이 안 된다네요." 지수 엄마의 전갈을 받은 날 저녁, 엄마는 민정이를 매섭게 몰아세웠다. "너, 왜 피아노 학원까지 구질구질하게 따라다녀?" "지수가 같이 가자고 해서..." "앞으로 절대 가지 마. 알았어?" 민정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음 날, 지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민정이에게 말했다. “오늘도 같이 가자.” “너희 엄마가 따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괜찮아. 같이 가줘.” 지수는 늘 그랬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싶은 것은 다 했다. 결국 참다못한 지수 엄마가 민정이의 길을 막아섰다. “왜 자꾸 귀찮게 따라다녀? 너도 피아노학원 다니던가” 그 차가운 질책 앞에 입을 꾹 다물고만 있는 지수를 보니 민정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수는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학교에 새로 생긴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민정이에게 내뱉는 말투에는 가시가 돋기 시작했다. “야, 이것 좀 들어봐” 어느덧 언니라는 호칭은 사라지고 무례한 반말이 그 자리를 채웠다. 신발주머니와 무거운 피아노 가방이 당연하다는 듯 민정이의 손으로 넘어왔다.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너한테 반말하래.” “키도 쥐꼬리만 한 애한테 왜 언니라고 하냐고.” 지수는 해맑게 웃었지만, 그 웃는 얼굴이 더 서늘해 보였다.


지수의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친구들 앞에서 모욕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너 우리 집에서 책 읽지 마!”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왜 우리 집 책을 니가 다 읽냐고 했어.” 민정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참으면 지나갈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한 번은, 지수의 단짝 친구가 말했다. “지수야, 언니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돼.” 지수는 비웃듯 민정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얘는 괜찮데. 그치?” 순간, 민정이 안에서 무언가 툭 끊어졌다. 민정이는 지수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싫은데” 지수의 눈이 순식간에 변했다. 바로, 신발주머니가 머리로 날아오더니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하나로 묶여있던 민정이의 머리카락이 풀어 헤쳐졌고, 이마에 피가 비쳤다. 지수는 아무 말 없이 뛰어가 버렸다.


민정이는 그 자리에 박힌 듯 서 있었다.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뒤섞여 가슴이 울렁거렸다. 연립과 통하는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엄마가 평소와는 다르게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민정이를 반겼다. 생전 처음 보는 환한 웃음이었다. “우리 딸, 이제 왔어?” 엄마는 민정이를 업어주었다. 팽팽하게 긴장했던 민정이의 마음이 눅눅하고 따뜻한 등에 닿는 순간 사르르 풀렸다.


연립 입구에 다다르자, 지수와 지수 엄마가 버티고 서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웅성거렸다. “너 왜 지수 때렸니? 욕도 했다며?” 멍하니 있던 민정이에게 지수 엄마가 다그친다. 억울한 누명까지 쓰게 되자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지수가…. 신발주머니로 때렸는데요.” 지수 엄마가 말했다. “거짓말을 어디서 배웠어? 우리 지수가 그럴 리가….” 자신만만하던 지수 엄마는 민정이의 이마와 산발이 된 머리를 보고, 말을 멈췄다.


민정이는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았던 말들을 토해냈다. “아줌마가 지수한테, 저한테 반말하라고 시켰다면서요! 그래서 제가 싫다고 했어요.” “피아노학원도 지수가 같이 가달라고 한 건데….” 골목이 술렁였다. 고상한 척 굴던 지수 엄마는 황급히 지수를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얼마 후, 지수 엄마는 민정이의 집 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민정아,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와.” “너 은수저로 밥 먹고 싶어 했잖아.” 하지만 민정이도, 엄마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날이 지수네 집과의 마지막이었다. 저녁 무렵, 선화 언니가 낡은 장난감 소방차를 들고 민정이네 집에 찾아왔다. 언니는 상처 난 민정이의 이마를 보며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낮게 한마디 했다. “거봐. 참지 말라고 했잖아.” 민정이는 그제야 알았다. 선화 언니가 말했던 ‘참지 말라’는 게 무엇이었는지.


민정이는 다시 그 동네의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눈이 펑펑 내리던 날, 레이스 커튼이 드리웠던 그 집은 경기도로 떠났다. 이제 더 이상 민정이도, 엄마도 그 커튼 너머를 동경하지 않게 되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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