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의 무게

by 규아

레이스 커튼이 펑펑 내리는 흰 눈을 따라 소리 없이 사라진 뒤, 연립의 가운데 집은 한동안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굳게 닫힌 문 뒤로 어떤 화려한 뒷얘기도 흐르지 않게 되자, 아이들은 더 이상 그 집 앞에서 발소리를 죽이지 않았다. 빈집은 계절이 바뀌도록 주인을 찾지 못한 채 골목의 배경으로 남겨지는 듯했다.


어느 날 아침, 정적을 깨고 분주한 소음이 연립을 메웠다. 낡은 문 위로 작은 나무 간판이 걸렸다. ‘피아노 교습소.’ 지수를 따라다녔던 그 거창한 피아노 학원과는 결이 달랐다. 묵직한 그랜드 피아노 대신 세월의 흔적이 묻은 피아노들이 들어왔고, 그 뒤를 따라 낡은 찬장과 밥상 같은 소박한 살림살이들이 이삿짐 트럭에서 내려졌다. 피아노 선생님인듯한 젊은 여자와 부모님으로 보이는 노부부, 가족들이 땀을 흘리며 짐을 날랐다. 그곳은 누군가의 일터이자, 동시에 누군가의 따뜻한 가정이었다.


간판이 붙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열린 창틈으로 서툰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동네 아이들이 그 집 문턱을 넘나들 무렵, 막내 삼촌 또래의 젊은 선생님이 민정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네가 민정이니? 들어와서 놀다 가.”


교습소에 다녀온 민정이의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민정이는 그곳에서 바이엘을 연습했다. 처음에는 낯선 아이들 틈에서 혼자 건반을 두드렸지만, 선화 언니도 민정이의 손을 잡고 교습소를 찾았다. 도.레.미.파…. 서툰 소음들이 화음으로 섞이며 민정이는 비로소 교습소 아이들과, 그리고 연립의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섞여 들었다.


엄마도 그런 민정을 더 이상 가로막지 않았다. 아니, 가로막을 힘이 사라졌다는 편이 옳았다. 레이스 커튼 뒤의 세계가 민정이의 이마를 찢어놓은 그 날 이후, 엄마의 빳빳하던 어깨에서는 서서히 긴장이 빠져나갔다. 절대 섞이지 않을 것 같았던 연립 사람들과 부대끼며, 엄마는 어느덧 이 동네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들은 이제 민정이의 집을 ‘부녀회장 집’이라 불렀다. 민정이는 그 호칭이 묘하게 낯설면서도 싫지 않았다. 한때 민정이의 집을 드나들던, 삼촌 친구들과 돈을 빌리러 오던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진 자리를 주형이 엄마, 철구 엄마, 그리고 선화 엄마 같은 이웃들이 채웠다. 집 안은 늘 사람 사는 냄새와 수다로 북적였다.


민정이는 이제 낮이면 항상 열려있는 연립의 문들 사이를 제집처럼 누볐다. 골목 아이들과 땀방울을 떨구며 놀다 목이 마르면 주형이네 집 부엌으로 달려가 물을 마셨고, 심심해지면 철구네 집 마당에서 낡은 자전거를 굴렸다. 배가 고파질 무렵이면 누구의 집이든 상관없이 숟가락 하나를 얹어 밥을 얻어먹었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놀다가, 정해진 시간에 피아노 교습소에 가고, 해 질 녘이면 아무 집 거실에 배를 깔고 누워 텔레비전을 보다 돌아오는 아이. 민정이는 그렇게, 평범한 연립의 아이가 되었다.


그 시절 민정이는 몰랐다. 그 '평범함'이 얼마나 얻기 어려운 기적 같은 것인지를. 누군가에게는 평범하게 살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 평범함을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무언가를 단호히 내려놓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친척보다 끈끈했던 연립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민정이는 세상을 배웠고 사람의 온기가 어떻게 상처를 덮는지를 깨달아갔다. 레이스 커튼은 사라졌지만, 그보다 훨씬 촘촘하고 단단한 사람의 그물망이 민정이를 감싸고 있었다.


그렇게 민정이의 1980년대, 장지동 연립에서의 첫 번째 계절이 저물고 있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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