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스 커튼이 있는 집

by 규아

그때부터 민정이의 하루에는 지수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등굣길도, 하굣길도, 피아노 학원 가는 길도 늘 함께였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자연스럽게 겹쳤다. 밖에서 아이들과 뛰어놀지도 않았고, 선화 언니와는 마주치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멀어졌다.


지수네 집은 늘 닫혀있었다.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면 식모 언니가 먼저 맞아주었다. 거실로 들어서면 화려한 소파 뒤로 너울거리는 레이스 커튼이 보였고, 그 옆으론 묵직한 피아노와 거대한 책장이 버티고 서 있었다.

책장 속에 꽂힌 세계명작동화 전집과 셜록 홈즈 시리즈, 그리고 금박이 박힌 백과사전들. 민정이는 그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누군가 읽다 만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책들은 손때 대신 각을 유지한 채, 그 집의 공기를 증명하고 있었다.


방마다 놓인 침대와 책상은 세트로 구비되어 민정이를 압도했다. 침대 머리맡에는 미미, 바비, 제니 같은 마론 인형들이 주인을 닮은 도도한 표정으로 줄지어 앉아 있었다. 민정이가 말로만 들어보았던, 꿈의 세계가 그곳에 실재했다.


식모 언니가 차려준 밥상도 낯설었다. 레이스보가 깔린 식탁 위에 똑같은 모양의 그릇들이 정갈하게 놓여있었고, 수저받침 위에서 식구들 수에 맞춘 은수저들이 은은한 빛을 냈다. 식모 언니는 늘 분주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아주머니의 말 한마디에 얼굴이 굳어졌다가도, 이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순하디 순한 웃음을 지었다. 가끔 붉어진 언니의 눈가를 보았지만, 그 집의 싸늘함은 그런 서글픔 따위는 금세 삼켜버렸다.


지수 엄마는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뜨는 습관이 있었다. 웃을 때조차 매서운 인상이었다. 하지만 민정이에게는 친절했다. “공부 잘한다면서?” “맨날 책만 읽는다고 하던데.” 그 칭찬은 민정에게 향한 것이라기보다, 민정이 뒤에 있는 엄마에게 보란 듯이 던지는 허락처럼 느껴졌다.


지수는 그런 엄마를 닮아 야무지고 당찼다. 예쁜 얼굴로 자기 이야기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떨어져 사는 아빠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꺼냈다. 대기업 이사였던 아빠가 모함을 받아 밀려났다는 서러운 사연, 경기도에서 화원을 시작하셨다는 막연한 기대감, 한겨울 비닐하우스 안에서는 반팔을 입고 일한다는 신기한 이야기들. 지수는 장지동 연립 너머의 세상을 들려주었다.


“같이 가자. 심심해”라며 졸라대는 통에 민정이는 지수의 피아노 학원에 따라 다녔다. 지수가 피아노를 치는 동안 민정이는 구석에 앉아 《소년중앙》이나 《어깨동무》 같은 잡지와 동화책을 뒤적였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시간이 마법처럼 흘러갔다.


민정이가 지수네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와도 엄마는 별다른 꾸지람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가서 얌전하게 굴어라”는 짧은 당부뿐이었다. 민정을 호되게 나무라던 목소리도 지수네에 들릴세라 잦아들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집, 부유한 집, 교육열이 높은 집. 연립에 감도는 그 달콤한 소문들이 엄마를 안심시켰다. 민정이가 ‘수준’이 있는 아이와 어울리는 것. 그것은 엄마가 그려두었던 자식 교육의 밑그림과 정확히 일치했다.


엄마는 민정이를 항상 냉정하게 대했다. 잘못하면 때렸고, 말로는 더 독하게 혼냈다. 하지만 옷은 늘 제일 비싼 걸 골랐고, 음식도 좋은 것만 먹였다. 자신의 집안처럼 자식만 주렁주렁 낳아 고생시키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오기. 아들을 선호하던 시대였지만 딸 하나만 낳아 제대로 키우겠다는 그 지독한 욕심이 엄마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민정이 역시 그즈음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흔들림인지, 올라서고 싶은 욕심인지는 아직 분간할 수 없었다. 선화 언니와 있으면 편했고, 지수와 있으면 설레었다. 골목의 흙먼지 대신 레이스 커튼 너머의 정제된 공기가 신기했고, 거친 언행 대신 조심스러운 침묵이 낯설면서도 우아해 보였다. 무엇이 진정으로 좋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민정의 발길은 자꾸만 지수네의 단정한 현관으로 향했다.


가끔 마주치는 선화 언니는 지수네 집을 흘겨봤다. “너, 저 집 애들이랑 너무 붙어 다니지 마. 쟤네 집 이상하데.” 민정이는 그 말을 질투 섞인 참견으로 치부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언니의 말은 늘 과했고, 지수네 집은 지나칠 만큼 평온하고 단정했으니까.


그때의 민정이는 미처 몰랐다. 레이스 커튼 너머의 공기가 언제까지나 부드럽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엄마가 동경했던 세계가, 실상은 아이를 지켜주는 울타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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