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랭이 쪽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민정이는 책가방 끈을 고쳐 메며 발걸음을 늦췄다. 흙먼지 날리는 말랭이 마을 입구, 공사 자재가 쌓인 곳에 아이들이 몰려 있었다. “이걸 저기 꼭대기까지 나르면 백 원씩 줄게.”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쌓인 벽돌을 가리키며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길가에는 이미 벽돌을 나르고 돌아온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고 있었다. 막대 아이스크림의 하얀 부분이 햇볕에 반짝였다.
아이들 사이에 말랭이 마을에서 민정이에게 구슬값을 달라고 협박하던 아이도 있었다. 민정이는 반사적으로 경계했지만, 예전과는 달라졌다. 눈이 마주친 아이도 민정이를 바라보더니 “너도 해”라고 무심하게 권유할 뿐이었다. 땀에 젖어 붉어진 얼굴로 “이거 세 개만 나르면 삼백 원이야.”라고 재촉했다.
민정이는 잠시 망설였다. 하루 용돈이 백 원인데 삼백 원이면 아이스크림을 세 개나 사 먹을 수 있었다. 이모, 삼촌들이 사줘야만 먹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이들이 우르르 서 있는 줄에 합류하고 기다리자 민정이의 순서가 되었다.
“여기, 등을 대.” 민정이는 책가방을 벗고 허리를 숙였다. 아저씨가 벽돌을 등에 올려놓았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벽돌을 이고 산등성이를 따라 말랭이 마을 꼭대기까지 가려니 허리가 꺾일 것 같았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등이 저리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손바닥에 닿은 동전 세 개의 감촉은 묵직하고 달콤했다.
민정이는 곧장 슈퍼로 달려가 아이스크림을 하나 골랐다. 혼자서는 사 먹을 수 없었던 그 아이스크림. 종이를 벗기자 싸한 찬 기운과 함께 달콤한 향이 올라왔다. 처음으로 ‘내가 번 돈’으로 사 먹는 아이스크림이었다. 하필 연립입구에서 엄마를 마주쳤다. “그 아이스크림 뭐야?” “지영이가 너 말랭이에서 벽돌 나르는 거 봤다더니만!” 민정이는 그제야 벽돌조각에 긁힌 상처의 쓰라림과 묵직한 찌뿌둥함을 느꼈다. 원피스 등판은 흙투성이가 되어 엉망이었다.
“애들을 데리고 뭔 짓을 시키냐고!” 민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자랑스러워했던 일이 감춰야 하는 죄처럼 느껴졌다. 엄마의 눈에는 등에 달라붙은 흙더미들만 보였다. 흙이 묻은 등에,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무거운 벽돌을 나르며 씩씩대고 있었을 딸의 모습이 겹쳐졌다. 등을 탁탁 치던 엄마의 손이 떨렸다.
“누가 시켰어?” “그냥… 지나가다가…”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냥은 무슨 그냥이야! 세상이 우습게 보이냐. 너, 또 선화네랑 어울려 다니면서 말랭이까지 따라간 거지?” 생각지 못한 죄책감에 민정이는 고개만 깊숙이 숙였다. 벽돌도, 아이스크림도, 삼백 원도 그냥 없던 일이 되었으면 했다. 엄마의 고함에는 선화네 집에 대한 불신과 이상해지는 무남독녀에 대한 두려움이 켜켜이 실려 있었다.
그때였다. “왔어요!” 트럭 엔진소리와 함께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정이와 엄마는 동시에 밖을 내다보았다. 그동안 비어 있던 옆집으로 이삿짐이 분주하게 들고나가고 있었다. 이삿짐에는 세계명작동화 전집, 명탐정 셜록홈즈 시리즈, 백과사전들이 있었다. 민정이는 눈이 커졌다. 정말 보고 싶은 책들이 하나씩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엄마는 전집을 사면 잘 안 읽는다면서 낱권으로 된 책만 사주었다. 하지만 민정이는 더 많은 책들을 읽고 싶어 했다.
피아노도 있었다. 흰 천을 덮어쓴 채 여러 인부들의 손에 들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앞치마를 두른 언니가 분주히 따라다녔다. 이 집에서 같이 사는 식모라고 했다. “서울서 이사 온다고 하드만. 잘 사나 보네.” 엄마가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큐빅이 검은 테에 박힌 안경을 쓴 매서운 인상의 아줌마가 나타났다. 어깨를 쭉 펴고, 연립을 내리깔며 보는 눈빛이 어쩐지 도도해 보였다. 민정이보다 한 뼘 이상 키가 크고 통통한 여자아이도 보였다. 뒤이어 보이는 여동생인듯한 아이와 새초롬하게 집에 들어갔다.
민정이는 이삿짐이 드나드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새로운 이웃은 사람들의 시선이 못마땅했는지 커튼부터 쳤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레이스가 살짝살짝 흔들렸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말랭이 골목과는 전혀 다른 공기였다. “잘됐네.” “저기 큰 애가 국민학교 1학년이래. 중앙국민학교로 전학한다고 하니까 같이 다니면 되겠다.” 엄마의 목소리에는 숨기지 못한 기대가 비쳤다. 선화와 멀어지게 할 좋은 기회라는 듯이. 민정이는 대답 대신 얼핏 얼핏 보이는 옆집의 내부에 눈길을 돌렸다.
사실 민정의 마음도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며칠 전, 선화네 집에서 본 싸움이 자꾸 떠올랐다. 선화 언니는 여전히 믿음직했다. 골목에서 자신을 지켜주던 든든함도 변함없었다. 하지만 언니 오빠들의 거친 말투, 일상인듯한 몸싸움, 누구도 말리지 않던 방관. 그 속에서 잠깐, 말랭이 무리들과 자신을 때렸던 또래의 억센 눈빛과 닮은 무언가가 겹쳐 보였다.
다음 날 이사 온 집 아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들은 쌍둥이처럼 똑같이 머리를 양갈래로 쫑쫑 땋아 올림머리를 하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프릴이 달린 옷소매와 치맛자락도 따라 흔들렸다. “지수야, 지연아, 들어와. 나가서 놀지 마”라는 소리에 까르르 웃으며 스카이콩콩을 가지고 나오다가는 금세 시무룩해지며 집에 들어가는 아이들. 그 이후로 옆집은 문도, 커튼도 항상 닫혀있었다.
민정이는 밖에 나갈 때마다 통과해야 하는 옆집을 바라보며 그 집안을 상상했다. 커튼 너머의 피아노, 그리고 세계명작동화 전집과 셜록홈즈 시리즈, 백과사전이 꽂혀있는 책장 옆에 마냥 앉아있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살짝 드러난 커튼 사이로 옆집을 들여다보다가 집안에 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숨어봤던 게 들통날까 봐 도망가려는 찰나, 옆집의 문이 열렸다. "우리 집에 들어와도 돼, 같이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