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서 테레비 보자!” 현관에서 쭈뼛거리던 민정이를 본 선화언니가 말을 걸었다. 연립 사람들은 대부분 문을 열어 두고 살았다. 연립의 입구에서 문틈으로 들여다보이던 언니의 신발이 민정의 시선을 붙잡았던 순간이었다.
선화 언니네 집은 민정이네 옆집, 또 그 옆. 연립의 가운데쯤 자리한, 골목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집이었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였지만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민정이는 단번에 차이를 느꼈다. 민정이네처럼 먼지 한 톨 없이 정돈된 집이 아니었다. 먹다 남은 과자 봉지, 발에 밟히는 만화책, 아무 데나 벗어놓은 옷들. 어수선했지만 묘하게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때 미닫이문이 스르륵 열렸다. “니가 민정이냐?” 며칠 전 민정이 엄마와 한바탕 언성을 높였던 선화 엄마였다. 그러나 얼굴에는 아무 감정도 묻어 있지 않았다. “밥 먹고 가라.” 민정이가 “네…”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선화 엄마는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다.
선화 언니는 집을 설명해줬다. 두 언니들과 함께 쓰는 방, 그리고 혼자 쓰는 오빠 방. “오빠는 남자라고 혼자 방 쓰고, 침대까지 있다니까.” 투덜거리는 말투에 익숙한 체념이 섞여 있었다. 둘은 거실 바닥에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양말, 책가방, 만화책이 흩어진 바닥 위에 그냥 앉아보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니 세상 자유로웠다.
오후 다섯 시, 모여라 꿈동산이 시작되었다. “명탐정, 명탐정, 바베크, 바베크…. 정의는 이기지요. 힘을 내요. 바베크” 둘이 신나게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던 그때,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다가왔다. “야, 뭐 보냐.” 골목대장, 선화 언니의 오빠였다.
오빠는 말도 없이 텔레비전 앞으로 와서는 채널을 툭 돌려버렸다. “야! 지금 우리가 보고 있잖아!” 선화 언니가 벌떡 일어나 오빠를 밀쳤다. “왜 밀고 난리야!” “니가 멋대로 다른 데 틀었잖아!” 말다툼은 금세 몸싸움으로 번졌다. 주먹치기, 발차기, 고함, 욕설. 민정이는 얼이 빠져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두 언니는 부엌에서 콩나물을 다듬고 있었고, 선화 엄마는 안방 문을 단 한 번도 열지 않았다. 이 집에서는 다툼조차 일상의 소음처럼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만 좀 해!” 선화가 오빠의 가슴팍을 밀며 소리쳤다. “니가 먼저 시비 걸었거든!” 싸움이 더 거칠어지려던 찰나. “밥 먹어라.” 안방에서 들려온 선화 엄마의 한마디. 높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 한마디에 집안 공기가 완전히 뒤집혔다.
방금까지 아수라장이던 남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싸움을 멈추고 안방으로 향했다. “이리 와. 밥 먹어.” 선화언니가 민정이에게 손짓했다. 민정이는 여전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따라나섰다.
안방 한가운데 놓인 밥상. 여섯 개의 숟가락과 젓가락이 놓여있었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김치찌개, 콩자반, 콩나물무침, 다꽝 몇 점. 민정이는 순간 자기 집 식탁을 떠올렸다. 생선구이, 계란말이, 두부조림이 늘 올라오는 풍성한 밥상.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단출한 밥상이 왠지 더 푸짐해 보였다. 잔소리도, 재촉도 없이 좁은 밥상에서 부딪히는 숟가락 소리가 식욕을 자극했다. 경쟁하듯 먹는 분위기에 민정이의 밥공기는 금세 비워졌다. “조그만 게 잘도 먹네. 짜꾸 나겄다” 선화 엄마의 말에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민정이는 “감사합니다.”라며 조그맣게 대꾸하고는 입에 음식을 넣었다.
밥을 먹고 나자 식구들은 자기 자리를 찾아 흩어졌다. 정리정돈은 느슨했지만 이 집만의 질서가 있었다. 해가 저물 무렵 민정이는 괜스레 불안해졌다. “나, 가야 할 것 같아.” 선화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만 흔들었다. “내일도 와.”
집에 도착하자 엄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선화네 집에서 밥 먹었다면서? 반찬도 없는 집에서 어떻게 먹었데?” 늘 매섭게만 들리던 목소리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다른 결로 들렸다. 정리된 신발들, 제자리에 놓인 가방과 물건들, 먼지 하나 없는 이 집이 새삼 든든하고 안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떠오르는 선화네 집의 소란. 주먹이 오가고 욕설이 튀어도 아무도 놀라지 않던 그 풍경. 무섭고 서늘했지만, 이상하게도 완전히 차갑지는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엄마의 잔소리가 오늘따라 괜히 정겹게 들렸고, 선화네 집의 어수선한 풍경도 자꾸 마음에 남았다.
민정이는 아직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선화 언니가 왜 그렇게 셀 수밖에 없는지,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분명하게 깨달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