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립 골목 끝에서 아이들 소리가 터졌다. 전봇대 아래 눈을 가린 술래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고 돌아보자, 달리던 아이들이 얼음처럼 굳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술래가 되는 놀이였다. 골목 가득했던 함성이 멎었고, 숨소리마저 잦아들었다.
그러다 “와!”하고 소리가 터지며 대열이 무너졌다. 다시 둥글게 모여든 아이들은 가위바위보를 하고 말뚝박기를 시작했다. 진 아이들은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가리지 않고 한 줄로 섰다. 그러더니 앞사람의 가랑이 아래로 차례로 머리를 넣고 말뚝이 되었다.
말뚝 위로 아이들이 우르르 올라탔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말뚝의 대열을 무너뜨리려는 아이들의 움직임에 고함과 웃음이 진동처럼 번졌다. 땀 냄새와 흙먼지가 엉켜 공기마저 텁텁해졌다.
그 틈에 유난히 작은 아이 하나가 있었다. 키도 덩치도 또래보다 한참 모자란 여자아이였다. 진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이는 이를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 하지만 풀려버린 무릎에 대열이 와르르 무너졌다. “야, 또 너냐?” 대장인 듯한 남자아이가 넘어진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머리끈이 느슨해져 머리카락이 흘러내렸고, 무릎과 다리는 흙범벅이었다. 아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소매로 땀을 훔쳤다. 그 사이 얼굴이 더 붉어졌고, 가슴이 거칠게 들썩였다.
그때 날선 목소리가 골목으로 날아들었다. “야, 그만해!” 키가 훤칠한 언니였다. 짧은 커트머리, 아이들보다 한참 큰 몸, 앙칼진 목소리만큼이나 움직임에도 거침이 없었다. 언니는 쓰러진 아이의 팔을 잡아 세워 올렸다. 그리고 대장 아이를 향해 턱을 들었다.
“오빠! 너 왜 잘하고 있는 애한테 지랄이야!” “왜 참견이야! 선화, 너나 잘하시든가.” 그 이름이 박혔다. 선화. 언니는 한 발짝 더 다가섰다. 목소리는 낮아졌지만, 눈빛은 물러서지 않았다. “왜 자꾸 작은 애를 술래 시키는데? 힘든 거 안 보여?” “한 번은 봐줘서 아딸꼬딸 시켜줘야지!” 남자아이는 입술을 씹었다. 아이들 사이에 짧은 적막이 흘렀다.
“그래, 민정이 지금부터 아딸꼬딸이다.” “잘못해도 두 번은 봐준다.” 결국 선화 언니의 오빠가 졌다. 대열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고,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함성을 질렀다.
조그만 민정은 선화 언니 곁에 바짝 붙어 섰다. 몇 달 전, 골목에서 두려움에 떨던 날처럼 그 등만 보이면 마음이 놓였다. 그 곁에서는 민정이가 알던 골목이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시 심부름을 다녀온 선화 언니가 놀이에 다시 섞이자 민정이는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센 척해! 누가 뭐라고 하면 대들고.” 언니가 늘 하는 말이었다. 몇 달 사이, 파리하던 민정이의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까맣게 되었다. 흙에 쓸려 튼 손등에 난 자잘한 상처들이 거칠함을 더해주었다. 그래도 쓰라린지 몰랐다. 뛰어노느라 그럴 틈이 없었다.
민정은 땀에 절어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엄마와 마주쳤다. “너 또 밖에서 애들이랑 놀았지.” 엄마의 눈이 얼굴과 팔, 무릎을 차례로 훑었다. 헝클어진 머리, 새까매진 얼굴, 더러워진 옷과 신발, “어디서 남자애들 가랑이에 머리를 집어넣고 놀고 있어?” “요즘 아주 난리가 났구만!”
민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엄마는 민정이가 선화와 어울리는 것이 못마땅했다. 연립에 이사 온 뒤 아이는 달라지고 있었다. 말대꾸를 하기 시작했고, 늘 밖으로 쏘다녔다. 얌전하던 아이는 옛날이야기처럼 멀어졌다.
한 번은, 엄마가 선화네 집에 찾아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싸납빼기라고 소문났던 엄마조차 그 집안의 기세를 이기지 못했다. 선화의 엄마도, 언니도, 오빠도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넘을 수 없는 벽이 따로 있었다. 선화의 아버지가 경찰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집에서 유일하게 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제복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이기던 시대였다. 엄마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분에 못 이긴 엄마는 집에 와서 한참을 퍼부었지만, 다음 날부터는 민정이를 막지 않았다. 연립 어른들의 말도 한몫했다. “애들은 또래랑 놀아야 돼.” “집 안에만 두면 더 아퍼.” 엄마는 입을 다물었다. 민정이는 방관 아닌 방관 속에 동네 아이들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나마 엄마를 위로한 건 아이의 변화였다. 밥만 먹으면 헛구역질을 하던 아이가 어느새 한 그릇을 뚝딱 비우더니, 이내 두 그릇도 해치웠다. 달라진 말투와 행동은 못마땅했지만, 식탁 위에서 비어 있는 밥그릇을 볼 때마다 엄마의 얼굴이 조금씩 풀렸다. 우량아를 선호하던 그때, 빼빼 말라 “베트콩 아가씨”라고 불리던 아이였다. 이제 그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땀과 흙과 햇볕이 민정이를 조금씩 다른 아이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마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민정이의 달라진 눈빛과 태도가 거슬렸다. “그러다 광어 눈알 된다”는 핀잔에도 날이 섰다.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 연립으로 내려온 선택이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 속내도 모른 채, 민정이는 태어나 처음 만난 새로운 바깥 세계를 온몸으로 부딪치고 있었다.
그날 밤, 실컷 놀다 온 민정이는 씻고 이불을 끌어당겼다. 얼굴 반쯤을 묻자 훈훈한 기운이 차올랐다. 노느라 발바닥이 욱신거렸고, 팔은 천근처럼 무거웠다. 그런데도 마음만은 가벼웠다. 요 몇 달 민정이는 그렇게 하루를 온전히 소진한 몸으로, 정말 아이답게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