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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립 언니에게 배운 세계의 법칙

by 규아

골목을 메웠던 고함이 가라앉고, 먼지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을 때까지 민정이는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아이는 연립 언니의 날선 목소리에 기가 꺾여 달아났고, 언니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민정이 곁으로 걸어왔다. 두 사람은 말없이 집 쪽으로 걸었다.


무섭고 혼란스러운 마음이 여전히 풍랑처럼 가슴을 흔들었지만, 이전과는 분명히 달랐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공포와 수치의 떨림이 아니라, 처음으로 누군가가 나의 편이 되어준 뒤 남는 설렘이었다. 집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언니가 짧게 말했다. “내일 또 오면 말해. 내가 처리할게.”


다음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늘 그 아이가 숨어 있다 튀어나오던 교차로에 이르자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민정이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이번엔 민정이보다 먼저, 연립 언니가 골목 어귀에 서 있었다. 언니는 천천히, 그러나 단단한 기세로 걸어가 그 아이 앞을 막아섰다.


그 눈빛은 누군가를 상처 내기 위한 잔인함이 아니라, 어떤 약한 존재를 지키기 위해 벼려놓은 단단한 칼날 같았다. “어제처럼 또 애한테 해봐! 해보라고!” 아이의 입술이 욕을 내뱉으려다 언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기세가 산산이 부서져서는 뒷걸음치며 도망쳤다.


민정이는 그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두려움도, 분노도 아닌 정의에 가까운 무엇이었다. 또 자기 자신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전조 같은 것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연립 앞 공터에 언니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언니는 말없이 서 있던 민정이를 돌아보며 담담히 말했다. “세상은 가만히 있는 애한테 더 달려들어. 착하기만 하면, 자신을 지킬 수 없어.”


언니는 욕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입 모양, 소리의 높낮이, 눈을 치켜뜨는 법까지. 처음엔 너무 어색해 입술만 달싹이다 말곤 했지만, 언니는 웃지 않고 진지했다. “따라 해. 이건 싸우려고 배우는 게 아니야. 나를 지킬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신호야.”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두려움 앞에서 침묵하는 순간, 너는 그 두려움에게 자신을 내주는 거야.”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하필이면 미문국민학교 옆 문구점에서 말랭이 아이들과 마주쳤다. 비아냥거리는 표정들에 두려움과 수치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랐다. 다리는 여전히 떨렸지만 민정이는 눈을 치켜뜨고 입술을 꾹 모았다가 다가오는 아이들을 향해 앙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꺼져! 나쁜 놈들아! 우리 삼촌들 깡패거든!”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물러났다.


그런 행동에 겁을 먹고 돌아설 아이들이 아니었다. 늘 당하기만 하던 민정이의 예기치 않은 기세에 순간 눌린 것뿐 일 게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민정이는 처음으로 스스로 자신을 지켜낸 순간을 지나고 있었다. 가슴은 두근댔지만 묘하게 숨이 트이는 쾌감을 느꼈다.


사람들은 여전히 민정이를 순하다고 했다. 하지만 누구도 몰랐다. 그 작은 아이 안에서 잠들어있던 세계 하나가 조용히 깨어나는 중이라는 것을. 언니가 알려준 것은 싸우는 법이 아니라 악에 대한 태도였다. 악에 대한 외면은 또 다른 악이라는 것, 악에 저항하지 못하는 무력은 스스로를 더 깊은 어둠에 넘기는 길이라는 것도. 민정이는 아주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민정이 세계의 부서진 틈으로 새어 나온 그 빛은 곧 그녀를 또 다른 세상으로 이끌 터였다. 연립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골목, 바람에 살랑대는 빨래의 향긋한 내음, 햇살이 부서지며 반짝이는 그 길 위에서 민정이는 처음으로 ‘같이’라는 세계를 향해 아주 작은, 그러나 분명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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