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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랭이에서 부서진 세계

by 규아

학교가 끝나자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민정이도 무리에 섞여 걸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이십 분 남짓. 요즘 같으면 멀다고 했을 거리였지만, 그 시절엔 누구나 그 정도는 걸어 다녔다. 새로 이사 온 집 바로 앞에 미문국민학교가 있었지만, 민정이는 다니던 학교에 남아 있었다.


엄마는 말랭이 아이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기 때문에 그 학교를 싫어했다. 무엇보다 제일국민학교나 부속국민학교 같은 사립은 못 보냈지만 “군산에서 제일 큰 학교 다닌다.”는 허세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 민정이는 자존심이었고, 엄마 자신의 세계를 떠받치는 장식 같은 존재였다.


민정이는 새집이 창피했다. 아이들이 말랭이 아랫마을로 이사 왔다고 놀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날도 예전 집에 아직 사는 것처럼 길을 틀었다. 미원시장 입구를 지나던 순간이었다. “민정아!” 누군가 반갑게 이름을 불렀다. 소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곧바로 고개를 깊게 숙였다.


때에 절은 빵모자, 거무튀튀한 전대, 삐그덕거리며 굴러가는 리어카. 외할머니가 외손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새로 이사 온 집처럼, 숨기고 싶은 풍경이었다. “너 부르는 거 아냐?” 함께 걷던 아이가 물었지만, 민정이는 땅만 바라보았다. “민정아!” 멀어지는 외침이 점점 더 애타게 변해갔지만, 발걸음은 오히려 더 빨라졌다. 외할머니의 목소리는 등 뒤 어딘가에서 떨리며 흔들렸고, 민정이는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그날, 민정이는 처음으로 집에 곧장 들어가지 않았다. 집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외할머니를 모른 척했다는 사실에 죄책감. 그보다 더 큰 건, 엄마와 외삼촌들의 분노였다.


발길이 자기도 모르게 말랭이 마을로 향했다. 엄마가 “절대로 얼씬도 하지 마라”라고 했던 곳. 팔마재 산자락에 기대어 낡은 판잣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대문도 없이 합판을 덧댄 벽들이 바람만 불어도 흔들릴 것처럼 보였다. 초입에서부터 진흙, 먼지, 연탄재가 뒤섞인 흙내가 훅 밀려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공기가 목구멍에 걸렸다. 햇볕이 닿지 않는 곳에 드리운 그림자가 오래 눌어붙은 듯했다.


그 골목 한복판에서 한 남자아이가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너도 할래?” 민정이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아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할 줄 모르는데.”, “알려줄게.”, “구슬도 없고…”, “내가 빌려주면 되지.” 색색의 유리구슬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눈깔사탕처럼 보이는 구슬들이 땅 위에서 또르르 굴렀다. 잠깐동안은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았다. 누구도 자신을 모르는 장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시간에 해방감을 느꼈다.


그때였다. 골목 저편에서 아이들 무리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거친 발걸음에 흙먼지가 들썩 일었다. “너 중앙국민학교 애지?” 합창단 복장과 하얀 타이즈를 입은 민정이를 보자 아이들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왜 여길 와?” “너네 때문에 우리 학교 합창대회 떨어졌잖아!” “잘난 척하기는….” 말끝마다 가시가 박혀 있었다. 아이들은 민정이를 돌담으로 몰아붙였다.


구슬을 빌려줬던 아이가 그 틈에서 표정을 바꾸었다. “구슬값 내놔”, “네가 빌려줬잖아.”, “빌려준 걸 네가 잃었지? 돈으로 내놔!” 목소리가 낮아졌다. 장난이 아니라는 걸 민정이는 직감했다. 생전 처음 마주한 이유 없는 악의였다. 심장뛰는 소리가 귀까지 퍼졌다. 숨은 가슴께에서 걸려 더 내려가지 못했다.


‘외할머니를 모르는 척해서 벌 받는 건가.’, ‘엄마 말을 안 들어서 이런 일이 생긴 거야.’ 많은 생각이 쏟아졌지만, 몸은 점점 굳어갔다. 그때였다. 아랫배에서 무언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어, 뭐야? 이 냄새….” 아이들이 일제히 코를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하얀 타이즈가 서서히 젖어갔다. 따뜻한 것이 다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과 함께 몸은 차갑게 식어갔다.


누가 뭐라고 했는지 그 뒤의 말들은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의 표정만 선명했다. 비웃음과 흥분, 그리고 잔인한 호기심이 가득 찬 얼굴들. 민정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날아든 건 엄마의 욕설과 등짝 세례였다. “이놈의 가시네가 옷에 오줌까지 싸고 다녀! 어디서 뭐 하다 온 거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예전만큼 엄마가 무섭지 않았다. 엄마의 고함과 손바닥이 등을 내리치며 공기를 울려도 말랭이 아이들의 나지막하고 잔인한 목소리보다 덜 두려웠다. 오직 아이들의 뒤틀린 얼굴만 떠올랐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 ‘내일, 그 아이들을 또 마주하면 어쩌지?’라는 걱정뿐이었다.


얼마 뒤, 장사를 마친 외할머니가 집에 들어왔다. 민정이가 외할머니를 외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집안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외삼촌은 민정이를 꾸짖고, 엄마는 “누가 그런 장사를 하랬냐!”며 외할머니에게 소리쳤다. 드시지도 못하는 소주 몇 잔에 금세 취기가 오른 외할머니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인 민정이는 깨달았다. 진짜 부끄러움은 남들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바로 그 순간에 찾아온다는 것을, 그리고 당장의 어려움을 피하려다가 더 무서운 곳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외할머니를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후회, 죄책감, 두려움이 한데 뒤엉키며 심장이 빈 깡통처럼 소리를 냈다.


연립 골목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의 고함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누군가는 잡히지 않으려 비명을 지르고, 누군가는 잡으려고 웃으며 쫓아가는 소리. 말랭이에서 들었던 거친 목소리와는 다른, 낯설지만 묘하게 따뜻한 울림이었다.


그날, 말랭이 골목에서 민정이의 세계는 금이 갔다. 연립 골목 아이들의 소란은 그 갈라진 틈 사이로 스며들며 소녀를 감싸고 있던 세계를 서서히 뒤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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