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이웃에 대해 호기심 가득한 사람들의 발길 따라붙었다. 좁은 골목 끝, 아이는 연립의 맨 끝집 앞에 멈춰 섰다. 바로 앞에 단독 주택이 있어 마당이 좁았다. 일자로 길게 늘어선 연립의 양쪽 끝에는 작은 창고가 이어져 있어, 마치 디귿(ㄷ)자 처럼 보였다. 대문도, 현관도 없었다. 좁은 통로만 지나면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너무도 개방적인 집. 뒤에서 웅성이는 사람들의 시선이 살림살이 위로 그대로 내려앉았다.
민정이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낯선 집이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인상을 찌푸렸다간 엄마의 욕설과 함께 매가 날아올 테니까. “먼지 묻으니까 가만히 있어”라는 엄마의 목소리는 언제나 단호했다. 민정이는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창문으로 쏟아진 햇살이 방 안을 채웠다. 그 빛 사이로 먼지들이 떠다녔다. 공기의 흐름을 따라 하늘하늘 오르다 어느새 풀썩 주저앉는 작은 실오라기들. 민정이는 그 모양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만질 수는 없으니 바라보는 일로 대신했다. 엄마의 말대로 조용히 있으면서도, 그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였다. 그 작은 먼지들이 제멋대로 부유하는 걸 보면 이상하게도 가슴이 간질댔다.
이전의 집과는 사뭇 다른 집에서도 이렇게 먼지를 바라볼 수 있는 게 좋았다. 이사 오기 전의 집은 높은 담과 무거운 대문으로 둘러싸인 성 같았다. 넓은 마당 건너에 또 다른 현관문도 있어서 이웃의 소리도, 아이들의 웃음도 닿지 않았다. 무남독녀인 민정은 언제나 어른들 틈에서 조용히 놀았다. 인형과 책만이 친구였다.
그 집엔 늘 어른들이 북적였다. 일수와 ‘달러 장사’를 하던 엄마 덕에 미군부대 사람들, 급전이 필요한 유흥업소 종사자, 장사꾼, 주부….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외삼촌의 주먹 친구들도 자주 놀러 왔다. 민정이는 그들을 이모, 삼촌이라 불렀고, 어른들이 가득한 집에 유일한 아이로 자랐다. 거친 말투가 오가다가도 민정이가 지나가면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아이의 어머니는 세상의 눈에 더 신경을 썼다. 머리가 흐트러지거나, 흙이 묻어있으면 아이는 여지없이 매를 맞았다. ‘예쁘게, 똑바로, 항상 웃어야 한다.’ 그게 엄마의 지론이었다. 누구 하나 좋지 않은 이야기를 흘리고 가면 “모든 게 다 네 잘못이다.”라며 시작되는 엄마의 히스테리를 다 받아내야 했다. 그래서 소녀는 항상 단정히 앉아 혼자서 인형놀이를 하거나 책을 읽었다
기억이 생기기 전부터 그렇게 살아왔기에, 민정이는 세상이 원래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몸은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무릎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아이에게 의사는 노이로제 판정을 내렸다. “이제 9살인 아이가 무슨 노이로제예요?” 엄마가 황당해하자, 의사의 눈길은 한 올 흐트러짐 없는 올림머리, 빳빳한 원피스와 흰색 타이즈 로 향했다. 그리고 수시로 아이의 옷을 털어대던 엄마의 손끝으로도.
그런 엄마가 이삿짐을 나르며 흥얼거렸다. “여긴 좋다. 방도 크고, 공기도 트였어.” 엄마에게는 이 집의 단점이라곤 보이지 않는 듯했다. 창문 너머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비석치기 하자!” “안 내면 진 거. 가위바위보!” 바람이 흙냄새를 몰고 들어왔다.
민정은 코끝을 찡그렸다. 엄마는 문을 닫으며 말했다. “이 동네 애들은 유별나네.” 그런데 민정이는 이상하게 그 흙냄새가 좋았다. 낯설고 거칠지만, 정이 가는 냄새였다. 엄마는 그새 흐트러졌다며 머리를 빗어주며 말했다. “인상 좀 펴. 웃어야 예쁘지.” 민정은 익숙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웃어야 혼나지 않았다.
웃음은 방패였다. 그래서 민정이는 항상 웃었다. 낯선 집, 낯선 냄새, 낯선 세상 속에서도. 햇살이 유리창을 스치며 엄마의 얼굴을 비추었다. 잠시 반짝이는 듯한 눈가. 오늘따라 엄마가 그리 무섭지 않았다. 한참 크고 나서야 알았다. 엄마는 슬플 때 더 크게 웃는다는 걸.